북부여의 민족영웅 동명성왕

2022. 10. 8. 14:48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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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을 기리는 사당이 지어져 건국시조로서 제사를 지낼만큼 고구려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는 그런 동명왕을 기리는 온갖 기록들이 나와 그를 칭송하였고, 동명왕은 우리의 민족영웅으로서 떠받들여지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만주에서 고구려인들이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을 추모대왕이라 밝히고 있을뿐 그를 직접 동명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주몽이 동명왕이었다면, 이 비석에서는 그의 업적과 유명세를 분명이 밝히면서 주몽을 직접 동명성왕이라고 칭했을 것입니다.

아마 후대로 전설이 계승되면서, 동명왕과 가까운 시기에 활동하면서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대왕과 서로 혼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동명왕은 북쪽에서 내려와 부여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 역시 주몽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더욱 후대사람들이 둘을 혼동하여 불렀던 모양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동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찬양했던 것에 비해, 지금 우리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동명성왕이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였다면 이렇게 찬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를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지내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동명성왕은 단군조선이 문을 닫고 북부여가 건국되었을때, 더욱 북쪽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렸을때부터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주변사람들의 시샘을 받았고, 그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다가 남쪽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를 살펴보면 정말 여러모로 주몽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모양입니다.

특히 동명성왕이 이름을 크게 떨친것은 당시 위만조선을 제압하고 왕검성을 점령한 한나라의 무제가 이 기세를 몰아 부여까지 쳐들어온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군을 막지 못한 부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을 무렵 주변의 병사들을 모아 한나라군과 싸워 크게 물리친 동명성왕이 전공을 바탕으로 결국 북부여의 군주까지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부여의 관련기록을 보면, 당시 부여의 세력변화를 알수 있습니다.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자식을 얻고자 산천에 제사를 드리러 가다가,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그 돌을 옮기게 하니 금색 개구리[蛙]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하늘이 내게 자식을 내린 것이다"라고 기뻐하면서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은 "하늘[日者]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비옥하고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발견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때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자가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돌아오지 않아, 부모가 나를 책망하여 우발수에서 귀양살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유화를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비추어 몸을 피하였으나 햇빛이 쫓아와 비추었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당시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의 계시를 받아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장차 다른 자손이 이 땅에 도읍하여 새로운 국가를 열것이니 옮겨가라는 꿈을 믿고 그렇게 한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

거기에 부여가 동쪽의 가섭원으로 옮긴후 해모수를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고 새로운 국가를 열었다는 기록을 보면 여러모로 이사람이 동명성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삼국사기에 해부루를 밀어내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한 해모수의 후계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입니다. 동쪽으로 밀려난 동부여는 물론이고 이렇게 기존 부여의 도읍지에 세워진 해모수의 후손 역시 우리 역사일텐데 아직 연구되지 않은 점은 상당히 아쉬운 점이 아닐수 없습니다.

특히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해모수라는 인물이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모수의 자손이었던 부여왕을 밀어낼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가진 인물 역시 해모수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열었다는 것이고, 주몽을 낳게된 유화부인 역시 해모수와 만난후에 한곳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햇빛을 보고 임신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보면 해모수야말로 단군이후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정통성을 차지하는 인물이 틀림없어보입니다.

 

이렇게 동명왕이 백성들을 구한 영웅이었기 때문에, 그가 민족영웅의 칭호를 얻을수 있었고 이후에 고구려를 세우는 주몽이 동명성왕의 신화를 차용하여 고구려의 건국 정당성을 높이는데 이용했다는 주장이 있는만큼 동명성왕은 한동안 백성들의 뇌리에 크게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동명성왕과 추모왕이 비슷한 건국신화와 비슷한 삶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동명왕과 추모왕이 혼동되었을 것이고, 후손들이 동명왕을 기리고 제사했던 행위가 후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에 대한 제사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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