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홍경래의 난

2022. 9. 21. 15:21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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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은 조선후기 순조시대에 일어난 민란의 한 사건으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 홍경래의 난 자체가 조선후기 흔하게 일어났던 수많은 민란과 크게 차이가 없고, 나중에 체포된 반역자들에 대한 엄격한 사형집행으로 본보기를 보였다고 하면서 두루뭉술하게 끝맺음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홍경래의 난은 생각보다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쳤고, 당시 조선사회를 크게 뒤흔들어놓은 커다란 사건이었던듯 합니다. 나중에 홍경래가 죽지 않고 관군의 포위망을 탈출해 조선땅 곳곳에서 암약하며 백성들을 돕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 정도로 당시 홍경래는 조선과 대립하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충분히 추정해볼수 있습니다.

 

순조 11년이었던 1811년, 대원수를 자칭하며 거병한 홍경래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미 조선사회에서는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을 차별하며 양반으로 대우해주지 않았고, 세금만 뜯어가면서 정작 강도높은 차별을 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가 주로 활동하면서 그와 관련있는 곳이었지만 조선 세조시기에 이징옥과 이시애가 함경도의 토착세력과 여진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역의 고장으로 찍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경력이 있는 함경도와는 달리 평안도는 크게 조선조정에 반기를 든적도 없었고, 오히려 조선후기에 청과의 무역이 늘어나면서 평안도로 몰리는 돈이 늘어나 부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근거도 없는 차별정책으로 인해 중앙정계와 거리를 둘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조정의 정책은 평안도와 함경도가 반역의 땅이라면서 차별하는 것이었는데,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대규모 반란은 남쪽의 부유한 삼남지방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전라도에서 일어난 정여립의 난이나 삼남지방을 크게 뒤흔든 이인좌의 난,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반기를 들고 충청도에서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 등을 보면 전부 조선의 지배체계를 뒤집어 엎을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히지도 않았고 그 땅에 사는 사대부들은 중앙으로 진출하는데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렇게 차별받던 평안도에서는 이미 늘어난 재력을 가지고도 별다른 영향을 미칠수 없었으며, 과중한 세금만 부담하면서 그렇게 불만이 늘어갔던 것입니다.

또한 평안도에 돈이 많이 몰리면서 당시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농민들이 많았는데, 이때 광산개발이 활성화되면서 서북지방으로 많은 일손들이 몰려들었고, 이때 모여든 사람들을 모아 홍경래가 결국 반란을 일으킨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1811년 10여년간의 치밀한 계획을 거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평서대원수를 자칭한 홍경래를 필두로 광산을 경영하던 우군칙, 진사시험까지 합격한 수재였지만 평안도 출신이라 더이상 출세할수 없던 김창시와 상인 출신으로 큰 부자였던 이희저까지 모여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반 반란군의 기세가 무서워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정주 등지를 전부 점령하였고 조선의 국경을 지키는 정예군사들이 모여있는 의주까지 공략할 정도로 세력을 크게 넓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안주일대로 내려갈 무렵 반란군에 내분이 발생하면서 발걸음이 잡혀있는 무렵, 조정에서 파견된 중앙군이 도착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의주방면을 공략하던 반란군이 크게 패하여 흩어진 후, 박천 전투에서 정부군에 크게 패배한 후 반란군은 정주성에 틀어박혀 항전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정부군이 당시 전투와중에 주변 민가를 초토화시키고 약탈하는 바람에 주변 주민들의 인심을 완전히 잃었고, 그 덕분인지 반란군이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정주성을 잘 지켜가면서 항전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정부군의 지휘관까지 교체하면서 공격을 거듭했지만 약 3개월 가량 반란군이 완강하게 항전하고 중앙군의 학살과 약탈에 고통받던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수성전을 전개하자, 결국 화약을 대규모로 성벽에 매설하고 폭파시켜 간신히 정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당시 반란군의 수뇌부는 거의 다 싸우다 전사하였고, 항전하던 주민들이 3천명 정도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정부군은 이들 중에서 노약자들만 남기고 약 2천명의 주민들을 전부 처형했다고 합니다. 남은 노약자는 목숨을 건졌지만 전부 노비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렇게 서북지방 일대가 쑥대밭이 된 채 홍경래의 난은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이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중앙군은 여러 무리수를 두었던 모양입니다.

서북지방의 민심이 좋지 않은 와중에 정주성을 포위공격하면서 주변에 있던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약탈하여 오히려 반란군의 손을 들어준 꼴이 되어버렸으며, 정주성이 함락되고 잡힌 민간인들 대부분을 전부 학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조정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반란을 일으켜도 주동자와 수뇌부들만 처벌하고 단순 가담자들은 방면하여 양민으로 살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홍경래와 끝까지 항거한 정주성 주민들은 사정을 보지않고 전부 죽여버린 것을 보면 당시 정부군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처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홍경래와 반란군은 죽음을 맞았지만, 이후에도 홍경래의 전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세도정치기의 어지러운 조선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진주민란을 필두로 조선 곳곳에서 탐관오리에 맞서는 반란이 속출할때도 홍경래의 이름을 사칭하는 세력들이 있을만큼 상당히 큰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반란 당시 반란군에 항복했던 지방관중에 선천부사였던 김익순은 가장 먼저 홍경래에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사람이 나중에 반란이 진압되고 항복한 것이 드러나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의 손자가 우리에게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이며, 나중에 반란군에 항복한 할아버지를 비난했다는 죄책감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왕조를 크게 뒤흔든 대규모의 반란이었고 주민들도 대거 희생되는 피해를 입은 평안도였지만, 나중에 일본의 손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민초들의 삶이 위협받을 때는 가장 앞장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방이기도 하니 다시한번 조선조정의 평안도 차별정책이 얼마나 어리석은 정책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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