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10국의 혼란기에 나타난 명군, 후주 세종

2022. 9. 17. 13:17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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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호령하던 당나라였지만, 환관과 지방의 절도사가 난립하는 과정에서 황소의 난이라는 치명타를 맞고나서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황소의 난에 동참하여 당왕조를 공격하던 주온은 황소의 패배가 눈에 보이자 바로 배신하여 당나라에 항복해버렸고, 그 덕으로 주전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으며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당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에게 황제자리를 빼앗아 5대 10국의 시작을 알리는 양나라를 건국합니다.

 

하지만 일자무식의 형편없는 인간인 주온이 세운 양나라는 북방의 이민족을 막아내는데 급급했고, 내부적으로는 그의 아들이 주온을 죽이고 형제들을 전부 제거한후 황제가 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양나라가 16년만에 멸망했지만 혼란스러운 5대 10국 시기에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가 될 정도로 이 시기는 완전한 혼란기였습니다. 중국대륙이 갈라져 서로 싸우는동안 우리 또한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하고 발해와 거란이 치열하게 전쟁을 거듭하는 복잡한 시기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혼란기 또한 비슷하게 찾아오는듯 합니다.

 

양나라의 뒤를 이은 국가들 역시 모두 무도한 인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백성들을 착취하는데만 골몰했는데, 특히 후진시기에는 북방의 거란이 침입해들어와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전부 학살하는등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런 와중에 후한왕조의 장군이었던 곽위는 당시 황제였던 유승우의 시기를 받아 암살위협에 시달리던 중에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습니다. 원래 명망있던 장군이었던 곽위는 군사를 일으킬 당시에 모든 가족들이 몰살당했기 때문에 처조카였던 시영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후유증이 컸던 모양인지 황제가 된지 3년만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곽씨도 아닌 시영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이미 황제가 되기 전에 능력을 인정받아 기대를 모은 시영은 32세의 젊은 나이에 주나라의 세종이 되어 통치를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잠재우며 하나씩 문제들을 해결해 나갑니다.

 

우선 북방의 거란이 쳐들어왔지만, 모든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하는 가운데 조광윤을 비롯한 장군들의 지지를 받아 거란과 크게 싸워 승리합니다. 이때도 일선에 있던 군사들이 무너지며 패배할 위기에 놓였을때, 조광윤이 결사대를 거느리고 출병하여 싸움의 전세를 바꾸어 놓았다고 하니 이때는 세종에게 큰 행운이 따랐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후 세종은 북방의 문제보다 남방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 남쪽에서 크게 번성하던 남당을 공격하여 영토를 할양받고 풍요로운 강남지방의 조세를 확보합니다. 서쪽으로는 사천지방에서 할거하던 후촉을 공격해 네개의 주를 탈환하고 후촉의 군주가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철군하여 위세를 떨쳤습니다.

이런 연이은 성공으로 그는 30년의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처음 10년동안은 천하를 안정시킨 후에 다음 10년은 경제를 안정시켜 백성의 생활을 도우며 마지막 10년에는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켜 부국강병을 완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즉위한후 군사작전과 함께 그동안 왕조교체의 원흉으로 지목된 절도사 문제에도 힘을 기울여 정비합니다. 

덕분에 나중에 주나라를 대신해 송나라가 들어섰을때 이때 정비된 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니, 송나라는 아무래도 주나라 세종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북방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거란을 정벌하러 떠납니다.

이미 예전에 거란의 원병을 얻기위해 장성 이남의 연운16주를 넘겨준 것 때문에 항상 거란의 침략에 시달렸던 주나라 군대는 바로 진군을 시작하여 곳곳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거란의 상황은 황제가 죽고 매우 정치가 어지러운 상황이라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고, 그렇게 순식간에 2개군과 4개의 진을 빼앗으며 주나라군이 승승장구할 무렵 갑자기 세종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렇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수도인 개봉으로 돌아온 세종은 갑작스럽게 병이 악화되며 어린 7살의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주며 죽었다고 합니다.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된 세종은 고작 5년 6개월 정도의 재위에 그쳤지만, 이 짧은 기간동안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보여줬습니다.

혼란만 거듭하던 시기를 끝내고 다시한번 통일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며, 제도개선과 개혁을 통해 6년 남짓한 시간동안 주나라를 완전히 천하의 패권을 가진 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그가 살아있을동안 남방에서 할거하던 정권에서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죽을날만 기다리며 술만 마셨다고 전해지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세종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면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세종이 좀더 오래 살기만 했다면 조광윤이 정변을 일으켜 송나라를 건국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중국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능력있는 군주로 기억되었을 거라는 가정을 하기도 합니다.

 

당시 세종의 능력이 탁월하고 신하들을 잘 배려했기 때문에 훗날 황제가 된 조광윤은 주나라의 시씨 황족을 죽이지 않고 잘 우대했으며, 특권을 부여한 덕분에 송나라가 몽골의 손에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시씨일족이 송나라 조정을 따라 남으로 가서 끝까지 몽골과 싸웠으며 결국 마지막에는 장렬히 전원 사망하는 결과를 맞았다고 전해지니 주나라의 세종이 짧은시간동안 남긴 인상이 그렇게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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