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0. 13:39ㆍ역사
고려의 15대 황제인 숙종은 조카에게서 찬탈한 것과 다름없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인지, 무언가 크게 보여주는 정책을 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문종때 고려에 귀부하여 제후로 있던 여진족들이 있긴 했지만 마침 완안씨부족이 강해지면서 고려와 충돌하고 있었고, 결국 고려와 친한 여진족들을 굴복시켜 고려와 직접적인 전면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문종때의 태평시대를 지나온 고려군의 약체화 때문이었는지, 고려군이 여진에게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원래 고려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던 여진에게 패배한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었는지 당시 숙종은 여진에 맞설 강력한 기병을 만들고 다시한번 여진의 완안씨와 싸우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군사육성이 바로 완성되는것은 아니었던지 숙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예종이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결국 1107년 예종2년에 그동안 육성한 별무반과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려 갑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선전한 고려군과 윤관 휘하의 유명한 무장인 척준경의 활약으로 고려는 여진을 물리치고 동북쪽에 100여리에 이르는 새로운 땅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그곳에 새로 성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하여 완전히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할 준비를 했으며, 곳곳에 있는 여진족들을 내쫓고 남쪽에서 고려백성들을 데려와 이곳에 이주시킵니다.
그렇게 동북에 완성된 9성과 함께 백성들까지 들어와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자 윤관은 가장 북쪽에 있었던 선춘령에 고려의 영토임을 알리는 고려지경이라는 비석을 세워 공식적인 고려땅임을 알립니다.
다만 이 비석은 나중에 여진의 손에 훼손되고 이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하니, 지금 이 비석만 찾을수 있다면 고려의 북방영토를 찾을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동북9성이 새롭게 축조되고 백성들까지 남쪽에서 옮겨와 살게하니 이렇게 고려의 새로운 국토개척이 완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여진족의 완안씨가 이곳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고려군이 상당히 선전하여 여진을 물리치고 수비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에는 윤관과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이 여진에게 패배했으며 1109년 개경에서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한 오연총의 고려군이 다시한번 여진에게 패배하면서 고려 조정에서는 이곳을 과연 지켜야 하는것인지에 대한 반론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곳을 되찾기 위한 전쟁으로 여진과 고려가 전부 지쳐갈 무렵, 완안씨 쪽에서 고려에 귀부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결국 고려조정은 이곳의 9성을 폐지하고 여진에 이 땅을 돌려주었습니다.
윤관을 비롯한 실무자들이 극력반대를 했지만 당시 고려의 국력을 쏟아부은 것에 비해 피해가 컸고, 특히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다른 귀족들의 압력 등으로 결국 9성을 축조한지 1년여만에 반환하고 만 것입니다.
이때 쌓은 동북 9성은 위치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제강점기에 이케우치 히로시나 쓰다 소키치같은 일본 역사학자들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동북9성의 위치가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라는 것이었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이들을 추종하는 강단사학계에 의해 정설처럼 떠받들여지다가 이제서야 조금씩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고려는 새로 개척한 땅에서 물러났지만, 전혀 소득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여진의 완안씨 역시 고려와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고려군에게 패했던 기억 때문인지 훗날 요나라를 격파하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을때에도 고려와 섣불리 맞서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북방영토는 나중에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이후 고려를 계승해서 일어난 조선은 태조때부터 고려의 북방강역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때부터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태종은 이것을 확정짓기 위해 명나라에 예문관 재학 김첨과 왕가인을 명나라 수도로 보내 이같은 내용을 명나라에 통보합니다. 이미 고려의 북방영토는 요동에 있는 철령부터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는 공험진 이남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명나라 영락제와 협상한 결과, 명나라에서는 철령부터 공험진 이남까지는 조선의 영토인것을 인정하고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귀속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었습니다. 또한 그곳에 살고있던 여진을 다스리고 단속하는 권리까지 조선에 있음을 인정했으니 큰 성과를 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국경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자 태종은 크게 칭찬하며 김첨에게 땅까지 하사했다고 하니, 고려의 영토를 계승한 조선 역시 철령부터 공험진 이남까지 조선의 영토인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거기에 이미 공험진을 포함한 동북9성을 여진에 반환하고 몽골에 쌍성총관부라는 이름으로 빼앗긴 이후 공민왕이 다시 찾아 우리 영토로 편입했다는 사신단의 협상 내용을 볼때 공험진 이남을 실질지배한 고려의 영토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의 북방영토를 확인할수 있긴 하지만, 다만 이제 여기서 우리가 언제 북방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철령과 공험진 이남까지의 땅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우리가 간도를 빼앗긴 것처럼 남의 손에 불법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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