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7. 20:21ㆍ역사
고려를 뒤엎고 건국된 조선은 이전 고려왕조와는 다른 통치이념으로 집권했다는 자부심과는 달리 여러모로 고려왕조의 정책을 답습합니다.
특히 고려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공격으로 해안가 주민들이 흩어지고 납치되면서 해안일대의 기름진 농토들이 방치되고 황폐화되면서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조선 최고의 명군이라는 세종이 즉위했을때 왜구의 중심지였던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노력을 했지만 역시 세종역시 왜구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여 제한적인 무역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나마 고려 후기부터 전라도 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곳에 왜구방어를 위한 작은 읍성들이 만들어졌는데 전주나 장흥, 남원같은 전략적 요지에 읍성을 축조하여 왜구를 방어하려 했습니다.
조선 세종시기에 축성하기 시작해 문종시기에 완성되었다는 영암읍성도 그런 읍성 축조로 만들어진 방어시설입니다.
원래 작은 읍성이라 방어를 위한 해자도 없는 취약한 성이었는데, 이곳이 을묘왜변에 왜군과 조선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입니다.
삼포를 개항한 이후, 아무래도 무역을 위해 건너오는 일본상인 뿐만 아니라 약속된 인원 외에 더 많은 인원들이 상주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왜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이 좋지 않은 인식에 더해 질이 좋지 않은 왜인들이 건너와 소란을 부리는 등 여러모로 충돌이 발생하는 삼포왜란이나 사량진왜변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한창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의 부정부패로 힘들었던 명종시절에 일어난 을묘왜변은 그저 역사 교과서에 한줄남짓한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결코 간단하게 일어난 전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555년 5월 11일 갑자기 전라도 앞바다에 나타난 왜선들은 70척의 배에 7천명 남짓한 대규모의 병력으로 곳곳을 공격해들어왔습니다. 이들은 풍요로운 전라도를 점령하고 특히 제주도를 배후기지로 삼아 이용할 생각으로 제주도까지 동시에 공격하여 조선의 방어선을 한꺼번에 돌파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라도 지방은 양반들의 무분별한 수탈과 이어진 가뭄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는데, 그래서인지 왜구가 쳐들어오자 조선군은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하고 격파되는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달량포에 상륙한 왜군은 바로 달량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화살이 떨어질때까지 선방하던 조선군은 화의를 제의했다가 조선군의 상황을 알아차린 왜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장흥부사 한온과 영암군수 이덕견은 달량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가 오히려 왜군에 포위당해 참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달량성의 함락을 시작으로 해남, 강진, 장흥 등지가 차례로 함락되며 전라도 남부 일대는 완전히 왜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지켜야 할 조선의 장수들은 왜군을 두려워해 제대로 방어하지도 않았고 인근 고을들의 구원요청도 무시한채 싸움을 피할 궁리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대군을 이끌고 온 강진현은 싸우는것이 두려워 군사를 이끌고 나가지 않았고, 중앙에서 파견된 이윤경과 이준경 형제의 활약으로 왜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윤경이 영암읍성에서 군민들과 합심하여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동안 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조선군을 이겨왔기 때문에, 영암에서의 패전에서 적지않은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 겁쟁이들 덕분에 왜군에 별다른 타격은 주지 못하고, 결국 왜군은 무사히 약탈한 물자와 포로를 싣고 유유히 바다를 통해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미련을 버리지못한 왜구는 한달후인 6월에 제주도를 공격합니다.
이번에는 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제주도를 완전히 빼앗을 생각으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제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왜군 천명을 맞아 제주목사 김수문을 중심으로 군민이 합심하여 왜군의 3일간 공격을 무사히 막아냈습니다. 조선군은 7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주도민들의 강한 항전으로 결국 왜군이 제주성을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이렇게 을묘왜변은 마무리됩니다.
을묘왜변은 그동안 방어태세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조선의 국방력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중종시절 일어난 삼포왜란때부터 국방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비변사가 설치되었지만, 을묘왜변 당시 비변사에서는 원론적인 말만 내놓을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을묘왜변 당시에 좀더 많은 왜군이 상륙하여 전라도를 가로질러 올라왔다면, 충분히 남원과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가 전부 점령당했을 것이며 아마 한성까지 올라가는 길까지 별다른 저항없이 뚫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쟁을 어느정도 예측한 선조의 반대를 무릅쓴 대비로 어느정도 방어선이 정비되었기 때문에 나름 조선의 방어역량이 빛났지만, 당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을 막지 못하고 중앙 정치가 엉망이 된 상황이라 한성에서 포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국방력에 대한 구멍을 체감한 조선이었지만, 이것을 거울삼아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했습니다.
지방군을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가 지휘하는 제승방략 체제를 도입하긴 했지만, 워낙 이후 20만의 대군을 쏟아부은 왜군의 물량공세에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고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이준경이 화포의 위력을 실감하여 개량된 화포를 사용하게 했고 그 이후 조선 수군이 화포중심으로 재편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그것 덕분에 이후 이순신과 이억기의 막강한 화포로 무장한 함대가 나올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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