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에 맞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던 이정기

2023. 4. 12. 12:26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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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고구려의 평양성이 내분으로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로 끌려갔고, 굉장히 대접받은 소수의 매국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당나라의 변방으로 흩어져 비참한 일생을 보내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끌려간 고구려인들 대부분은 노예와 같은 하층민으로 살아야했고, 소수의 사람들은 고선지와 같은 무장이 되어 출세의 가도를 달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채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중에서도 당나라에 적극 협조하고 당나라를 위해 싸웠던 고선지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하는 과정에서도 당나라인이 아닌 고구려인이라 더욱 차별받았던 모양입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 이전에는 이민족 출신들도 전공을 세우면 장군으로 발탁하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당나라였지만 이민족 장군들이 일으킨 반란 이후에는 아예 이것마저 막혀버렸으니, 고구려 유민들이 출세할수 있는 방법은 거의 막혀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불세출의 영웅인 이정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정기는 당나라가 동쪽의 거점을 두었던 영주에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이후 이정기는 그나마 고구려 유민이 출세할수 있었던 무인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의 하북일대를 전부 장악하자 당시 평로절도사인 왕현지가 병으로 죽었고, 그의 아들이 절도사를 세습하려 하자 이정기가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사촌형인 후희일을 절도사로 추대하여 당나라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정기를 경계한 후희일은 오히려 그에게 절도사 자리를 빼앗겼고, 반란군을 피해 산동성 일대로 옮겨가 그곳에서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로절도사와 치청절도사를 겸임하게된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지리를 이용하여 중개무역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발해로부터 들어오는 군마를 독점판매하여 더욱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합니다.

 

당시 이정기의 근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위박절도사 전승사는 자신의 세력을 믿고 당나라 조정의 말을 듣지 않으며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는데,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전승사를 토벌하여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당시 당나라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곳곳에서 할거하는 절도사 세력을 통제하지 못해 골치를 앓았는데, 그 과정에서 평로치정절도사 이정기가 당나라 조정의 신뢰를 받고 위박절도사 전승사를 토벌한 것입니다.

 

그렇게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한 이정기는 이제 한발 더 나아가 당나라의 생명줄인 대운하 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 전까지만해도 이정기의 힘을 빌려 다른 절도사들을 견제하고 있던 당나라지만, 이정기가 대운하를 통제하고 막아버릴 결심을 하자 그때부터는 이정기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전과는 다른 절도사들에 대한 강경책을 편 당나라 덕종이 즉위하자 이정기와 당 조정간의 갈등이 커졌고, 주변 절도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가는 대운하를 막아버리게 됩니다.

강남지역은 당나라 조세수입의 80퍼센트를 담당하는 곳인데, 이 물길을 막고 당나라 조정을 압박하자 결국 이정기를 인정하고 절도사들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장안을 버리고 도망다니던 덕종의 입장에서는 이정기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결국 그를 인정하고 모든 특권을 보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정기는 당나라를 정벌하여 고구려의 원수를 갚고 싶어했고, 결국 당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모든 부대편성을 마친뒤 장안을 향해 출정하려는 순간 병으로 쓰러져 사망하고 맙니다. 781년 5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이정기는 이때 당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우리 역사에서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이납이 절도사를 세습하였고, 비록 운하쪽의 영토를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납이 죽고 난 후에는 아들인 이사고가 세습하여 이어받았고, 그가 죽은 후에는 동생인 이사도가 승계하여 치청번진을 운영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치청번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일이 일어납니다.

덕종의 뒤를 이어 환관에 의해 옹립된 헌종은 상당한 능력자였으며, 그동안 당나라 조정이 제어하지 못한 절도사들을 하나둘씩 무력으로 제압하며 원화중흥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낸 군주였습니다.

동쪽에 있던 치청번진은 당장 토벌대상이 아니었고, 주변의 약한 절도사들을 하나하나 토벌하던 당나라는 결국 칼끝을 이사고가 통치하던 치정으로 돌립니다.

이사고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강회지역의 물자를 저장해둔 당나라의 창고인 하음창을 습격하여 태워버리는 한편, 당시 치청에 대한 토벌을 주장하는 재상이던 무원형을 암살하고 배도에게 중상을 입혀 당나라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당나라 덕종때만 해도 절도사들에게 장안을 내주고 쫓겨다니던 신세였지만, 그때부터 진행된 개혁과 중앙군의 강화로 인해 당나라의 실력이 많이 늘었으며 헌종 재위 이후에 결국 강화된 군사력으로 치청을 공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당나라 조정이 직접 다른 절도사들과 함께 이사도를 공격했는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도중에 당나라는 다시 전통적인 이이제이의 전술을 구사합니다.

신라조정에 사신을 보내 신라도 이사고를 공격하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다른 절도사를 공격할때는 당나라 중앙군을 이요한 헌종이지만, 아마 치청을 완전히 끝장내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사방에서 원군을 끌어들였던 모양입니다.

 

비록 신라군이 직접 참여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지만,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와 무령군 소장으로 있던 장보고가 치청 토벌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보니 확실히 같은 민족끼리 싸웠다는 점은 안타까운 점이긴 합니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던 와중에 치청이 밀리기 시작하자 결국 이사고의 측근들이 그를 암살하고 당나라 조정에 항복하면서 결국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할거했던 60여년간의 이정기 왕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정기는 정말 결정적일때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모든 군사를 동원해 당나라를 공격하려는 와중에 병으로 죽은 이정기도 그렇고, 이후 쓸모없이 노는데 집중하던 당나라 황제중에서 가장 능력있는 중흥군주로 평가받는 헌종이 즉위해 치청을 공격한점도 상당히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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