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로서의 능력은 부족해보이는 김유신

2025. 8. 7. 12:02역사

반응형

신라의 일통삼한 정신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결국 고구려까지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며 우선은 신라주도의 통일로 귀결되긴 하지만, 그런 가운데 신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유신은 아무리 살펴봐도 장수로서의 능력에는 의심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삼국사의 김유신 열전은 그의 능력을 과장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김유신의 후손인 김장청이 쓴 김유신행록을 거의 압축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전지전능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기록된 김유신의 행적을 살펴보면 장수로서의 능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고, 위기를 부하의 영웅적인 죽음이나 군주의 능력 혹은 외부의 조력으로 돌파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의 능력을 의심할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우선 김유신은 17세때 노인에게 비법을 전수받았고, 18세에 화랑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경력은 35세가 될때까지 전혀 기록에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이 시기는 신라가 백제와 치열하게 싸웠고, 고구려 또한 신라를 공격하면서 분명 나이어린 화랑들이 동원되어 싸움에 투입되었을텐데 이상하게도 김유신의 경력은 철저히 기록되지 않고 공백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알수없는 공백을 지나 고구려의 낭비성 전투에 김유신의 이름이 보입니다.

무려 17년의 수련을 거쳐 등장한 김유신이지만, 뭔가 장수보다는 전사에 어울리는 기록을 보여주며 역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거기에 고구려의 낭비성을 지금의 청주로 비정하는 강단사학계의 상식도 이해할수 없지만, 어쨌든 낭비성에서 김유신은 고구려의 장수를 베어넘기며 성을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김유신이 48세가 되는 642년, 백제 의자왕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해왔습니다.

의자왕은 지금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명군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성들을 함락시키며 전투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김유신 장군은 48세라는 장수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나이대로 추정되는 의자왕의 군대를 전혀 막지 못했고, 결국 신라는 44개의 성을 잃어버리며 대패를 기록하고 만 것입니다.

특히 신라의 변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대야성마저 백제장군 윤충이 이끄는 군대에 함락되었는데, 삼국사에서는 이런 원인을 대야성의 성주인 품석의 잘못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는 기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밀리던 와중인 644년 김유신이 군대를 동원해 백제의 일곱개 성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백제의 반격을 받아 빼앗은 성을 그대로 토해냈고, 또다시 일곱개의 신라성을 빼앗았지만 김유신은 전혀 막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후인 647년 백제장군 의직은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왔고, 김유신은 훨씬 많은 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습니다. 의직은 이후 백제 멸망까지 활약하는 유능한 장군이었던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오히려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상황에서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김유신을 구한건 그의 휘하에 있던 비녕자와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비녕자와 그의 아들이 목숨을 바쳐 신라군의 사기를 올렸고, 그로인해 분노한 신라군이 승리할수 있었다고 하니 역시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김유신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백제는 다음해 신라를 공격해 열개의 성을 더 빼앗았고, 반격에 나선 김유신이 20개의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곧바로 백제는 또 일곱개의 성을 빼앗았다고 하니 확실히 밀고밀리는 일진일퇴의 모습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삼국사의 기록에서는 김유신이 백제를 막아섰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보내줄 것을 구걸하면서 당장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정말 김유신이 구국의 명장이었다면 백제를 막아서고 나아가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일통삼한을 이루었을테지만, 현실은 백제의 윤충이나 의직같은 장수들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거기에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화친한 상태에서 말갈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해왔고, 655년에는 신라의 북쪽 변경을 이들과 함께 공격해 신라의 30개 성을 함락시켰지만 김유신은 이들을 전혀 막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도비천성이라는 곳을 함락시키며 체면치레했지만, 나머지는 전혀 기록에 없으니 신라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를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듬해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백제도 이들을 지원하지만, 역시 신라의 김유신이 출정해 크게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없는것을 보면 그의 능력은 수비에 치충되어 있는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또한 삼국사 김유신 열전에서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잃어버린 44개의 성 대부분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전부 김유신 열전에만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에 기록이 없으니 과장되었거나 일부 공적을 부풀린 것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그렇게 외세를 이기지는 못했지만, 선덕여왕의 재위기간동안 패전을 거듭하며 귀족인 비담의 난이 일어나 신라를 뒤엎으려는 시도가 벌어지기까지 했지만 비담을 비롯한 국내세력은 철저히 때려잡는 유능한 모습을 보인 김유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660년 드디어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공격했는데, 김유신은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지만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의 공격을 받아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장수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김유신은 화랑인 반굴과 관창을 보내 개죽음을 당하도록 갑질을 시전했고, 결국 이전 네번의 전투에서 완패한 신라군은 이후 간신히 백제군을 제압하고 당군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당의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속시간을 어기고 한참 늦게 도착한 점을 책망했고, 결국 그 책임을 물어 신라 독군인 김문영을 처형하려 했다는 기록을 보면 확실히 군사의 수적 우세를 가지고도 계백의 백제군을 압도하지 못한 그의 능력을 확인할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백제는 당군의 공격앞에 멸망했고, 이제는 고구려가 공격대상이 되었습니다.

662년 당나라는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고 식량도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기습을 두려워해 철수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김유신이 군량을 가지고 보급하러 평양으로 향하게 됩니다.

분명 추운 날씨로 인해 신라군과 말들이 동사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평양에 있던 소정방을 만나 군량을 전달했고 보급을 받은 당군은 황급히 철수해버렸습니다. 아마도 기록에는 없지만 고구려의 추격군이 당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신라군 역시 공격을 받아 피해를 보았겠지만 이상하게도 추격해온 고구려군 1만의 수급을 베고 여러 장수를 사로잡았다는 불가사의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분명 평양까지 군량을 가지고 오면서 동사할 정도였고, 당군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친 상황에서 신라군이 단독으로 작전을 벌여 고구려의 추격군을 만명이나 죽였다는 내용을 보면 쉽게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그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와 신라가 싸우는 전쟁이 시작되지만, 김유신은 나이가 많고 통풍으로 더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673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분명 김유신은 신라에서 이름난 장수였고, 당나라와 고구려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맞았던 모양입니다.

당나라에서도 그를 인정하고 벼슬을 내렸고, 사후에는 흥무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추존되기까지 했으니 신라의 정신적인 지주였던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형편없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싸워온 백제마저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그저 방어에만 급급했으며, 분명 수적 우세를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부하의 죽음을 종용해 군사들의 사기를 꼼수로 올리려는 모습을 자주 보이면서 대장군보다는 선봉장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나 추측해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