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재위기간에도 명나라에 힘을 부여한 융경제

2025. 7. 18. 11:21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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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11대 군주 세종 가정제는 세종이라는 묘호가 아까울만큼의 암군이었습니다.

처음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정덕제의 뒤를 이을때까지는 뛰어난 능력과 명석함으로 많은 기대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명나라의 황제가 된 이후에는 실정과 판단착오를 반복하며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해버렸습니다.

거기에 가정제는 15세에 즉위해 59세에 죽었을만큼 쓸데없이 튼튼한 건강을 자랑했고, 그 덕분에 가정 연간에는 엄숭을 비롯한 간신들이 날뛰고 북쪽의 몽골이 준동했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활개치며 수많은 피해를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었던 목종 융경제는 가정제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형들이 먼저 요절하는 바람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평소 도교에 깊이 빠져있던 가정제는 도사의 말을 듣고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융경제는 태자수업을 전혀 받지 못한채로 즉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융경제는 아버지의 잘못을 하나하나 고쳐나갔습니다. 특히 간신들의 모함으로 파면되었던 충신 해서를 다시 등용하고, 능력있기로 유명한 서계와 고공 등을 중용해 국정을 바로잡았습니다.

또한 가정 연간에 왜구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척계광과 요동에서 여진을 방어하는데 공로가 있는 이성량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이른바 북로남왜라 불리는 명나라의 근심을 없애는데 큰 기여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몽골의 알탄 칸이 이전부터 명나라를 괴롭혀왔는데, 그래서인지 융경제는 이쪽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알탄 칸은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고 인적자원을 채우기 위해 연례행사로 명나라를 공격해 약탈해갔는데, 백련교의 교주였던 조전이 명나라 정부의 추적을 피해 알탄 칸에게 망명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조전은 알탄 칸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그를 부추겨 몽골 황제로 즉위해야한다는 바람을 넣었고, 그 덕분에 시기에 따라 이동하던 알탄 칸은 거대한 도성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며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를 밟아나갔습니다.

 

하지만 알탄 칸이 그의 손자인 바간나기가 혼인하려던 여자를 빼앗자, 분노한 나머지 탈출해 명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부 명나라의 대신들은 그를 죽여야한다는 의견도 냈지만, 융경제는 현명하게도 이를 이용하면 명나라의 이익이 될 것이라며 그를 우대하고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알탄 칸은 손자가 명나라로 가버린것에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느꼈고, 결국 명나라를 공격해 손자를 되찾으려는 생각으로 대군을 일으켜 침공을 시작하게 됩니다.

전쟁이 벌어지려는 순간 바간나기가 명나라에서 우대받고 안전한 상태라는 것을 알탄 칸이 확인하게 되었고, 결국 명나라의 조치에 감복한 알탄 칸은 명나라를 배신한 한족들을 송환하고 손자인 바간나기를 데리고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명나라와 동등한 입장을 고수하던 알탄 칸은 융경제의 조치에 감복하며 결국 명나라의 신하를 자처하게 됩니다.

명나라의 조공질서에 편입된 알탄 칸은 만성적으로 시달리던 물자부족 문제를 해결할수 있었고, 명나라는 그동안 시끄러웠던 북방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가정제가 거의 40여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북방문제였지만 융경제는 뛰어난 능력으로 6년여만에 해결하고, 남방의 왜구 잔여세력까지 무찔러 한동안 변경을 안정시켰으며 충신들을 복권해 정국을 바로잡은 그의 능력은 정말 탁월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근면성실하게 국가를 돌본 융경제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여색을 지나치게 밝혀 원래 즉위할때는 건강했던 그의 몸이 불과 6년만에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아버지 가정제는 도교의 도사들이 올린 정력제와 불사약들을 먹고도 수십년간을 버틴 강철체력이었지만 융경제는 몸이 약해지자 복용한 정력제를 먹고 탈이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만력제 역시 48년간을 재위하며 건강을 과시했는데, 아버지와 아들과는 다른 약한 체력 탓에 융경제는 이런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겨우 6년여의 재위기간을 뒤로하고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명나라 목종 융경제는 짧은 재위기간이 아쉬운 황제였습니다.

아버지 가정제가 전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보고 자란 탓인지 태자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정확한 판단과 결정으로 명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고 혼란했던 국가를 바로잡았으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 이후 이어지는 만력제시기 장거정의 개혁의 단초를 제공할수 있었던 능력있는 군주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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