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일대를 요새화한 송나라 장수 여개

2025. 7. 23. 11:10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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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천지방은 험준한 지형과 비옥한 땅으로 풍요롭지만 공격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 사천으로 들어가면서 근거지를 마련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북벌을 시도하는 요새가 되었던 곳인데도 이후 사천은 그런 명성에 전혀 걸맞지 않은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한 서진왕조는 곧바로 일어난 내부혼란과 황족들간의 싸움으로 거의 자멸해버렸고, 마침 공격해온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수도인 낙양이 함락되고 서진왕조가 멸망하면서 사천지방 역시 저족의 손에 넘어가 성한왕조가 건국되는등 혼란을 겪다가 다시 동진의 환온에게 점령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후에는 남조의 영역으로 남아있다가 양나라의 분열시기에 북쪽에 있던 북주의 침입을 받아 힘없이 함락되고, 당나라 이후에는 전촉과 후촉으로 독립했다가 송나라에 합병되는등 이전의 험준한 금성탕지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1234년 남송이 몽골과 연합해 금나라를 멸망시켰지만, 국경을 맞대게 된 두 나라의 싸움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위해 송나라를 삼키려는 몽골과 이전 북송시대의 영토를 찾겠다는 남송의 헛된꿈이 부딪힌 것이 송 이종 시기 낙양과 개봉을 일시적으로 되찾은 단평입락이라는 사건이지만, 몽골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더불어 물자부족과 현지 인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송나라의 무능으로 6만이 넘는 정예병만 잃고 땅도 전혀 확보하지 못한 남송의 철저한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남송을 공격했고, 분명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버텨야 할 사천일대는 몽골기병의 침입을 받고 초토화됩니다. 한중을 비롯한 요새들이 전부 함락되거나 항복해버렸고, 사천일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성도역시 몽골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거기에 사천 옆쪽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었던 양양도 함락되어 남송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을때, 송나라의 유명한 명장인 맹공이 나타나 모든 싸움을 이기고 땅을 되찾았으며, 사천일대로 진군해 몽골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결국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과 동시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갔지만, 사천일대는 완전히 초토화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송나라 이종은 뛰어난 장수였던 여개를 사천으로 보내 이지역의 방어를 전담하게 합니다.

여개는 사천일대에서 먼저 활약한 맹공의 수비전법을 바탕으로 몽골기병의 접근이 제한되는 산기슭에 조어성을 비롯한 산성을 쌓고 서로 긴밀한 연결로 방어선을 구축해 이지역의 방어를 완성시켰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사천일대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신상필벌을 철저히 시행했으며, 성들이 포위되어도 살아남을수 있게 산을 개간하고 연못과 우물을 마련해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사천이 안정되면서 몽골이 여러갈래로 사천을 공격했지만 모두 여개와 산성방어선에 막혔고, 잃어버린 한중 일대의 땅까지 되찾는 쾌거를 올리며 여개는 사천의 방어를 극대화하고 군사력을 정비해 이후 벌어지는 전쟁에 대비할수 있는 힘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여개는 송나라 조정과의 대립과 더불어 재상인 사방숙과의 불화로 결국 병을 얻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벌어지는 몽케 칸과의 싸움에서 이전에는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산성방어선이 무너지고 합주 조어성에서 장기간 대치가 이어지는데, 결국 이곳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몽케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몽케 칸도 전사하는등 패배를 당하며 허겁지겁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여개는 송나라 중앙정부와 불화가 생겨 억울하게 죽어갔지만, 그래도 생전에 완성한 사천의 방어선으로 인해 몽골제국은 송나라 공략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천의 방어선을 피해 운남과 호남지방으로 쳐들어온 쿠빌라이 역시 인근에서 구원병이 몰려오는 송나라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결국 이후 20여년간을 더 송나라가 지속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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