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모용선비의 치열했던 싸움

2025. 4. 18. 12:07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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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건국 초반부터 선비족과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후한 말엽에 등장한 선비족의 전설과도 같은 영웅이었던 단석괴의 등장으로 선비족은 전성기를 맞았지만 단석괴가 죽고 난 이후 분열되었고, 그중에서도 모용선비는 고구려와 악연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3세기쯤 모용선비는 굉장히 강성해져 예전에는 상국으로 모시던 부여와 고구려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중에서도 부여에 큰 타격을 입혀 285년 모용외가 이끄는 선비군은 부여의 도성을 함락하고 부여왕 의려가 자살했으며, 만명이 넘는 부여인들이 모용선비에 끌려가는 화를 입고 말았습니다. 이때 부여가 남긴 역사기록들도 전부 잿더미로 변했으며 그로인해 부여는 국력이 크게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서진왕조의 원조를 받으며 태자인 의라가 선비군을 물리치고 국가를 재건하기는 했지만 예전같은 국력을 가질수 없었고, 346년 다시 쳐들어온 모용황의 선비군을 막지못하고 도성이 함락되고 5만명이 넘는 백성들과 귀족들이 끌려가면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고 마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던 부여가 사라지자 직접 대결이 시작되는데, 이미 이전 봉상태왕 시절에 고구려와 모용선비는 싸운 경험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폭군이었던 봉상태왕이지만 당시 북부대형 고노자를 등용해 신성에서 모용선비를 잘 막아냈기 때문에 더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하고 부여공격에 집중했던 모용선비였는데, 이제는 부여가 사라져 완전히 고구려가 노출된 것입니다.

미천태왕 시기에 크게 국력이 늘었던 고구려지만 모용황이 이끄는 모용선비군은 정예기병으로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켰으며, 미천태왕의 시신을 파서 가져갔으며 태후를 비롯한 인질들과 5만이 넘는 포로를 끌고가 고구려에 큰 타격을 입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모용황에게 고개를 숙일수밖에 없었으며, 모용황은 부여와 고구려를 모두 제압하고 전연왕조를 건국하며 최전성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북방을 통일한 부견의 전진에 패하며 멸망했고, 다행히 고구려도 적수가 사라지며 한숨을 돌릴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북방지역을 통일한 부견의 전진이 100만이 넘는 대군으로 남쪽의 동진왕조를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주력군이 궤멸되며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동쪽으로 도망쳐 중산을 도읍으로 후연을 건국했으며,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사방의 적들을 제압하고 전연의 판도를 넘어 더욱 큰 영토를 확보하는 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 덕분에 고구려 역시 일부지역을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으며 모용수가 북위와 싸우다가 참합피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시점까지 수세적인 입장으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북위에 수도인 중산을 내주고 용성으로 물러났지만 후연은 고구려와 지속적으로 싸웠고, 그로인해 국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모용수가 죽은후 후연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더불어 빈번하게 발생하는 쿠데타로 정권이 불안정해집니다.

특히 고구려에 뛰어난 지도자인 광개토태왕이 등장하면서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고, 모용희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완전히 후연의 하락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한때 모용황도 빼앗지 못했던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아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신라에 갔던 고구려의 주력군이 돌아오자 그대로 토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모용희는 모용수의 아들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지만 후연의 군주가 된 후에는 부씨자매를 총애하면서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국고를 낭비하는 등 오히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는데, 407년 후연의 주력군을 궤멸시키고 여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했던 숙군성과 장무, 연군성 등을 전부 함락시키고 후연의 군사를 완전히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었으며 그렇게 수도인 용성으로 가는길이 뚫려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후연이 멸망직전의 상태에 놓이자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고구려의 후손인 고운이 천왕으로 추대되어 새로운 북연이 건국되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모용덕이 새로운 남연을 세워 산동 일대에 할거하게 되며, 이로인해 후연의 광대한 영역은 고구려와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가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북연의 천왕으로 즉위한 고운은 모용황시절 끌려간 고구려인의 후손인데, 고구려 태왕의 방계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렇게 고운이 즉위하자 광개토태왕은 영토가 쪼그라든 북연을 제후국으로 삼아 고구려에 편입했으며, 이후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킬때도 수도 화룡성 안의 모든 주민과 귀족들을 고구려로 이주시키고 성을 철저히 약탈해 북위군에 황폐화된 성을 넘겨주었으니 그로인해 모용선비는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결국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치열했던 싸움은 고구려의 최종승리로 막을 내렸고, 선비족의 역사는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가 주도하게 되니 이렇게 모용선비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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