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5. 12:05ㆍ역사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에는 평왕의 재위중이었습니다.
초나라 평왕은 진나라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기위해 태자비가 될만한 진나라의 공주를 데려오기 위해 신하 비무기를 파견했는데, 그가 보기에도 진나라의 공주가 워낙 미인이었기 때문에 여자를 좋아하는 평왕을 부추겨 그녀를 태자비가 아닌 후궁으로 들이게 합니다.
대신 태자비는 따로 구해주기는 했지만, 비무기는 이후 태자가 초나라의 왕이 되면 자신의 목숨을 해칠것 같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태자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태자의 스승인 오사와 그의 큰아들 오상을 체포하여 처형했으나 작은아들인 오운은 초나라를 탈출해 이미 타국으로 망명한 태자를 만나 복수를 다짐하는데 그가 그 유명한 오자서입니다.
이 와중에서 처형되기 전 오사는 아들인 오자서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앞으로 초나라에 큰 환란이 있을것을 경고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있듯 오자서는 훗날 복수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렇게 태자와 오자서는 정나라로 갔다가 사건에 휘말려 태자는 정나라에서 죽어버리고, 태자의 아들과 오자서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한창 떠오르던 오나라로 향했습니다.
당시 오나라의 장군 광은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여기에 오자서가 합류하며 당시 왕이었던 료를 죽이고 오나라의 왕이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또한 손자병법을 저술한 병법의 대가로 알려진 손무까지 합세해 오자서의 소원이었던 초나라를 공격해 도읍인 영까지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초나라 소왕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으며, 그렇게 초나라 도읍에 입성한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지만 이후 오자서의 복수를 두려워한 평왕은 무덤을 굉장히 찾기 어려운 곳에 만들었지만, 계속된 오나라군의 방화와 약탈로 초나라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결국 위치가 발각되었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주한 평왕와 오자서지만, 최후의 승자가 된 오자서는 시체에 구리채찍을 내리쳐 300여회를 가격했으며 사체가 완전히 흩어져 형체마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훼손해 그의 복수를 완성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이때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일어납니다.
강남일대의 양나라는 당시 일어난 후경의 난으로 수도인 건강이 함락되며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한의 명신이었던 진식의 후손인 진패선이 병사를 모아 왕승변이라는 장수와 연합해 도읍인 건강성을 되찾고 후경의 난을 진압하면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도읍인 건강이 크게 훼손되면서 양나라의 수도는 형주의 강릉으로 옮겨졌으며, 진패선과 왕승변은 큰 신임을 얻는 신하가 되었지만 또다시 큰 시련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양나라의 형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위의 권력자 우문태는 사신의 대접을 트집잡아 본격적으로 양나라를 공격했는데, 중요한 근거지인 양양의 소찰이 항복하고 양나라를 공격하는 참사가 일어나면서 결국 강릉이 함락되고 양나라 군주였던 소역이 피살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제가 이전에 포로로 잡아간 소연명을 양나라의 군주로 세울것을 요구했고, 왕승변은 이에 굴복해 그를 군주로 세우는데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진패선은 이런 조치에 반발했고 건강 인근 석두성에 주둔하던 왕승변을 공격해 그와 소연명을 죽이고 소방지를 새로운 군주로 세웠으며, 왕승변의 남은 세력들을 전부 토벌하면서 양나라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후 왕승변의 잔여세력들과 북쪽의 북제가 함께 연합해 10만이 넘는 정예병으로 양나라를 공격했지만, 진패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큰 승리를 거두고 결국 양나라를 대신한 진나라를 건국하며 최종 승자가 되는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진패선이 죽고 그의 후손들이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북방에서는 북주가 등장해 북제를 제압하고 괴뢰국으로 남은 강릉의 양나라마저 폐지하며 강국이 되었지만 외척인 양견을 막지 못하고 그에게 찬탈당해 수나라가 세워집니다.
결국 수나라의 양제가 되는 양광은 589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진숙보가 통치하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한번 통일을 이룩하는데, 이때 수나라의 관리를 지내던 왕반이 나타나 다시한번 복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왕반은 앞서 진패선에게 살해당한 왕승변의 아들로, 진패선에 대한 증오심으로 살아남은 인물이기 때문에 건강이 함락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바로 난입한 것입니다. 그렇게 진패선의 무덤을 찾아낸 왕반은 묘를 파헤치고 진패선의 시체를 꺼냈으며, 오자서처럼 300번을 구리채찍으로 내리쳐 시체를 산산조각낸후 태워버렸다고 전해집니다.
거기에 남은 뼈는 다시 완전히 태워 나온 재를 물에 띄워 마셔버렸다고 하니, 왕반 역시 철저히 복수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오자서에게 죽은후 모욕을 당한 평왕은 국가간의 믿음을 깨버리는 한편 어리석은 판단과 간신의 꼬드김을 이기지 못하고 명문가를 박살내 이런 모욕을 자처한 잘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자서가 그런 잔혹한 복수를 했음에도 어느정도 동정의 목소리를 얻을수 있었지만, 이후 벌어진 왕반의 복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진패선은 비록 함께 거사를 일으킨 왕승변을 주살한 잘못이 있긴 하지만 양나라를 공격한 북제군을 크게 물리쳐 강남일대를 보존했고, 진나라를 세운 후에는 검소한 생활과 열심히 정사에 몰두해 쓰러져가던 국가를 구해낸 공로가 있는 창업군주입니다.
그런 나름의 공로가 있는 진패선의 시체에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매질한 왕반이기 때문에, 당시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고 처벌받을 직전까지 몰렸으니 오자서와는 다른 조금 편협한 복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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