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에서 장군으로, 말년에는 역적이 된 한명련

2025. 3. 23. 11:2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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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우리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비극이었지만, 당시 전쟁을 통해 천민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꾀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왜병의 머리를 일정이상 베어오면 공적을 인정받아 천민에서 면천되어 양인으로 올라설수 있었으니, 임진왜란 초반에 조선이 밀리던 시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신분상승의 꿈을 쫓아 왜병의 머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명련은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황해도에서 천민 출신으로 태어나 병졸로 전쟁에 참여한 한명련은 그 용감함을 인정받아 조정에서 포상할 정도였으며, 이후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최전선에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예를 들자면 왜군에게 포위된 상황에서도 열심히 싸워 포위를 풀고 오히려 적병을 죽이거나 지휘관을 생포해 기밀을 알아낼 정도로 전투 하나만큼은 인정받은 상태였습니다. 명나라의 구원군을 이끌고 온 총병 마귀는 그런 한명련을 칭찬하며 선조 앞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한명련, 정기룡을 뛰어난 장수로 꼽을 정도였으니 그의 무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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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자 선조 역시 한명련을 몹시 아꼈는데, 그가 부상을 당하자 직접 의원을 보내 치료해줄 정도였고 급료를 공급하는 등 굉장히 총애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앙군을 통솔하는 5위의 장이 되었는데, 원래 천민출신인 그가 이렇게 벼락출세하자 당장 조선의 관료들은 그를 모함하고 시샘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명련은 직접 자원해 변방으로 떠나고 맙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명련은 다시한번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에는 유능한 장수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한명련이 바로 적임자로 낙점되어 후금과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전해주기도 했고 북방의 침입에 대비한 군대를 양성하는 등 광해군의 수족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인세력과 능양군이 정권을 찬탈하며 인조로 즉위하자, 한명련의 신변에도 위협이 생기게 됩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신하들은 모두 파직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는데, 북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한명련 역시 의심을 받았고 마침 정권찬탈에 큰 공을 세웠지만 변방으로 밀려났던 이괄이 부임하며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별다른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도 인조와 서인세력은 끝임없이 그들을 의심하며 감시하기 바빴고, 결국 인조와 서인들은 이괄과 한명련을 반역무리로 규정하며 반란을 일으키도록 자극하고 말았습니다.

 

 

 

이괄과 한명련은 왜란때 조선에 항복한 항왜를 비롯한 기동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해왔습니다.

국가를 지켜야 할 군대가 칼을 돌려 내려오는 순간 조선의 정규군은 박살나며 도망치기 급급했으며 이들은 파죽지세와 같은 모습으로 도성인 한성까지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반란군이 잠깐 진군을 멈추고 있는 사이 남쪽의 근왕군이 올라오고 사방에서 지원병이 도착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북방의 날고기는 만명의 정예병이었지만 보급이 차단되고 사방에서 공격하는 상황을 이겨내기 힘들었고, 결국 같은 천민출신으로 왜란때 활약으로 장군까지 오른 정충신과 명장 남이흥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괄과 한명련은 소수의 기병만 이끌고 이천까지 도망쳤다가 부하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임진왜란때 전투력 하나만으로 천민에서 장군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은 한명련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입니다.

 

역사에서 이괄의 난으로 불리는 이 반란사건은 조선에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조선이 왜란 이후 열심히 양성한 정예군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으며, 이괄과 한명련 같은 경험많고 노련한 장수들이 쓸데없는 의심으로 반란으로 내몰린끝에 죽어버렸으니 서북쪽의 방비가 완전히 뻥 뚫리고 만 것입니다.

거기에 또다시 이 지역에 군대를 양성하게 되면 이괄처럼 반란을 일으킬까봐 견제한 나머지 군대도 없어 훗날 안주성에 쳐들어온 후금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남이흥은 군사훈련 한번 해보지 못한 상황을 한탄하며 죽어갈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은 후금으로 도망가 후금군의 길잡이가 되어 조선을 침공했으며, 의주성을 직접 함락시키는 공적을 세웠으니 조선군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라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뒤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황제가 된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가 신하들에게 포위를 풀 계책을 내놓으라고 질책하자 한명련같은 신하가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간언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이 모든 것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친 장군을 반역자로 몰고간 능양군 인조에게 최종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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