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8. 11:25ㆍ역사
고려왕조를 뒤엎고 건국된 조선왕조는 인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들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유를 여러가지 나열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의 동의를 받기에는 정당성의 무척 약해보입니다.
이렇게 정당성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개경 주변에서는 이성계를 증오하는 이들이 만든 성계탕이 유행할 정도였고, 고려의 명망있는 유신들은 두문동에 들어가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겠다는 절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변절자들은 고려가 망할수밖에 없는 나라였다면서 억지를 부렸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로 든 것은 고려말 귀족들이 땅을 수탈하고 겸병해 하천과 산으로 경계를 이룰 정도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런 토지제도의 문란 덕분에 이것을 수습하고자 건국되었다는 조선은 바로 토지제도의 문란이 생겨나게 됩니다.
조선건국 공신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우대했으며, 후에 계속 일어난 왕자의 난과 같은 내란을 통해 공신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특히 이후 조카를 죽이고 찬탈한 세조때에 이르면 공신들의 숫자가 너무 늘어나 직접적으로 토지를 나눠주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종시기에는 관수관습제를 채택해 토지대신 녹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을 정도지만, 그 후에 등장한 권신 윤원형은 명종의 비호를 등에업고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뇌물을 받았으며 왕실의 재산도 착복하는 등 고려시대의 귀족들보다 더한 위세와 수탈을 보여주게 됩니다.
결국 조선건국 세력이 내세운 토지제도의 개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고려 귀족들의 손에서 토지를 빼앗아 자신들이 착복한것과 다름없으니 여기에서 또한 그들의 조선건국은 명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정치부패와 왕실혈통 단절의 이유도 고려가 망해야 할 이유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치부패는 조선 역시 예외가 없었고, 조선의 명군이라는 세종조차 조정의 부정부패를 완전히 척결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나마 신하중에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은 황희와 맹사성조차 알고보면 자신의 아들과 사위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있을 정도로 조정의 기강은 고려에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단종을 죽이고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고, 그 뒤를 이은 예종시기에는 북방에서 큰 공을 세운 남이가 제거되는등 결코 고려에 비해 안정된 정국이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이어지며 서인과 동인으로 대표되는 당파싸움이 일어났고, 결국 임진년의 난리가 일어나 조선왕조가 몰락 직전까지 몰리는 와중에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과연 조선이 고려보다 안정된 정치를 했는지 묻고싶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려왕조가 부활하는 것은 철저히 막고 싶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까지 살아남은 고려황족들을 집단으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고려왕조의 정통이 끊기는 일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뒤로는 고려황족들을 찾아내 한곳에 모이게 하고, 섬으로 보낸다면서 배를 태워 전복시켜 집단으로 수장시키는 등 고려황족들은 상당수가 죽어버려 고려왕조의 재건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성시되던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결국 땅에 파묻어버렸으니, 그렇게라도 끝까지 고려를 철저히 감추고 폄하해 재건을 막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조선의 어전에서는 철저히 고려에 대한 언급을 막았다고 합니다. 지나의 역사와 일화는 그렇게 인용하기 좋아하면서도 고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고, 언급하더라도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었으니 혹시 고려에 대한 열등감 덕분에 그런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또한 조선은 고려의 역사마저 조작했습니다.
고려는 이미 건국 당시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해동천자를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북방의 거란이나 서쪽의 송나라 역시 고려를 무시하지 못했고, 고려 문종시기에는 수많은 번국들이 조공하고 황제의 장수를 비는 의식을 거행하는등 동방의 패자로 군림했지만 조선은 이런 내용을 전부 제후국으로 조작하게 됩니다.
고려가 후기에 몽골에 굴복하면서 제후국의 위치로 격하되기는 했지만 공민왕이 몽골을 물리치며 옛 땅을 되찾으며 예전의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조선은 그것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철저히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하며 고려의 황제국 기록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것입니다.
이런 폐단을 세종시기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며 어느정도 바로잡기는 했지만 역시 사대모화에 열심이었던 세종답게 고려의 진실된 모습을 복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고려사를 잘 살펴보면 고려황제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있어 철저히 제후국으로 기록한 고려의 내용과 뭔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앞서 나열한 조선건국의 이유보다 조선왕조는 고려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은 상태에서 천명을 받아 건국했다는 억지논리를 가장 크게 강조했습니다.
이성계가 이미 고려의 민심을 장악했고, 고려의 덕이 쇠퇴한 상황에서 하늘의 명을 받아 건국한 조선이라는 것이지만 잘 살펴보면 이것이 헛된 주장임을 잘 알수 있습니다.
고려 말에 이성계가 크게 민심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홍건적을 무찌른 안우와 김득배 그리고 이방실과 정세운 같은 능력있는 장수들이 한꺼번에 제거된 탓이 크다고 봅니다. 이들의 공백으로 인해 이성계가 급부상할수 있었고 동녕부를 토벌해 옛 고려의 영토를 되찾으며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명성은 운이 좋았던 결과라고 볼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민심을 얻은자가 고려의 명장이었던 최영을 죽인것 또한 속좁고 옹졸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고려의 황족들 역시 집단학살한 사건 역시 역설적으로 민심을 얻지못해 이들을 죽일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은 후주의 시씨들을 전혀 죽이지 않고 우대해 민심을 얻고 관대함을 자랑할수 있었는데 이성계는 최영을 죽이고 고려황족들을 해쳤으며,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는 고려 유신들도 불을질러 죽이는등 민심을 얻은자의 관대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했으니 이것 또한 전혀 설득력없는 주장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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