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의 명장 완안올출과 그의 후손들의 기록

2024. 9. 25. 11:09역사

반응형

송나라는 거란의 요나라에 대한 원한이 커서인지, 자신들의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채 금나라를 끌어들여 요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특히 연운 16주 일대에 버티고 있는 요나라 잔당을 송나라가 공격해 차지하려고 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요나라 잔당마저 이기지 못하고 송나라의 정예병은 패배하였으며, 결국 금나라를 다시 끌어들여 이곳을 점렴하게 됩니다.

 

연운 16주 일대는 금나라가 모든 물자와 인적자원들을 가져가 완전한 빈땅으로 송나라에 반환되었지만, 고토를 회복했다는 사실에만 집착한 송나라는 여기서 또다시 멀리 도망친 요나라 천조제와 결탁해 금나라를 공격하려는 공작을 펼치다가 비밀문서가 금나라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된 금나라는 우선 천조제를 잡는데 주력합니다. 이때 등장한 완안올출은 금 태조 아골타의 넷째 아들로서, 어렸을때부터 명장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10대의 나이에 요나라 정벌전에 참여해 도망치는 요나라군사를 사살하며 결국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까지 사로잡는 전공을 세우면서 완안올출은 그 이름을 역사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금나라는 송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주력군을 남쪽으로 돌렸고, 완안올출 역시 금나라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송군을 무찌르며 활약했습니다.

그렇게 금의 1차 침입때는 각지에서 모여든 송나라의 근왕군들과 영토 할양, 그리고 막대한 세폐까지 약속하며 금나라가 우선 물러나긴 했지만 이후 송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시 금나라의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1126년 송나라의 도성인 개봉은 8개월간의 포위끝에 함락되었고,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대다수의 황족들과 지도층들은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으로 끌려갔으며 개봉성 안에 보관중이던 막대한 금은과 재화들도 몽땅 털리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정강의 변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송나라는 멸망했으며, 간신히 도망친 황족 조구가 남쪽의 남경에서 송나라를 재건하고 남송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금나라는 이런 기세를 몰아 완안올출에게 군대를 맡겨 송나라를 정벌했으며, 각지에서 송나라군은 전혀 완안올출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공격하던 금나라군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남경에 있던 송나라 조구는 황제라는 체면을 집어던지고 남경에서 허겁지겁 도망쳐야했으며, 황급히 도망치는 과정에서 결국 성기능을 상실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남경과 항주일대까지 점령한 완안올출이었지만, 이때 강력한 적수를 만나게 됩니다.

남송의 명장인 악비와 한세충이 이끄는 군대가 그를 막아선 것입니다. 특히 한세충이 이끄는 군대에 큰 타격을 받은 완안올출은 대다수의 군사를 잃고 북으로 도망가야했으며, 악비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개봉 일대를 수복하기 위한 정벌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안올출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남송정권의 약점이었던 재상 진회를 협박해 악비를 제거하고 한세충의 병권을 빼앗아 상황을 반전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송나라의 북벌은 실패하고, 금과 송은 화의를 맺어 화북일대는 금나라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버리며 완안올출 역시 재상의 자리에 올라 금나라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https://youtu.be/CVSdFclJH7I?si=7WtLuf7JDkr8rxXz

 

 

이렇게 완안올출은 금 태조의 아들다운 대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렸지만, 이후 상황은 반전됩니다.

희종황제를 죽이고 금나라의 황제가 된 해릉왕은 금나라 태종의 자손들을 전부 죽였고, 그를 위협할만한 황족들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완안올출의 자손들도 제거대상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수도를 탈출해 서쪽의 감숙성 일대에서 완안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고, 그들의 직계조상인 완안올출을 기리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완안올출의 이름이 후손들의 기록으로는 김올출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왜 김씨로 기록되었는지 후손들도 정확히 모른다고 하며, 완안이라는 성을 지켜오면서도 김씨와의 정확한 내력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런 내역은 훗날 여진족이 직접 펴낸 역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알수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여진족 스스로 기록한 그들의 기원과 원류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는 것으로, 한족의 시각으로 쓰여진 금사와는 다른 금나라의 국호에 대한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통고와 대금국지에는 모두 신라로부터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고려와 더불어 옛 땅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요사나 금사에서는 왕왕 두 나라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 사전(史傳)의 기록으로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의 왕은 김(金)씨 성으로 수십 세를 서로 전하여 온 것인즉,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건국한 나라의 이름 또한 당연히 이것을 취하였다. 금사지리지에서 나라 안에 금이 있는 물줄기가 있어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이며 전거로 삼기에 부족할 따름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금나라의 국호는 건국 당시에 신라와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신라 김씨의 성을 따서 지은것이라는 내용을 유추할수 있습니다. 특히 완안씨의 시조 함보는 성이 김씨고 고려에서 왔다는 내용의 기록을 보면 금나라의 황족인 완안올출이 왜 김올출로 전해졌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