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5. 10:52ㆍ역사
1214년 금나라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북경 일대에 건설한 새로운 수도인 중도를 버리고 남쪽의 변량으로 도망간 선종은 중도를 사수해야 한다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도망치고 말았고, 칭기즈칸은 이것을 배신행위로 규정하고 중도를 공격해 함락시켜버렸습니다.

남쪽으로 옮겨간 금나라는 남쪽의 송나라와 손을 잡고 몽골과 싸워야 했지만, 오히려 남송을 공격해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으로 정예부대를 쏟아부어 의미없는 전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해 송나라로부터 받던 세폐마저 끊어지고, 각지의 농경지와 농민들이 몽골에 파괴되고 죽어가던 순간 오히려 금나라는 제대로 된 방어마저 힘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북방의 강국으로 성장한 금나라였기 때문에 몽골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을 다시 복구해 방어역량을 키웠고, 곳곳에서 몽골이라면 이를 가는 소수민족들과 금나라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몽골은 금나라를 정복하는데 30여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정예부대가 있습니다.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충효군은 적은 숫자로도 곳곳에서 몽골군을 때려잡으며 이름을 떨쳤고, 금나라가 망하는 그 시점까지 배신하지 않으며 싸웠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충효군은 출신이 굉장히 복잡했다고 합니다.
우선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모아 강력한 훈련을 통해 강군으로 거듭났으며, 몽골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기 때문에 충효군 한명이 몽골군 두세명은 기본으로 때려눕혔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전투력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의 삼별초 역시 좌별초와 우별초, 그리고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온 신의군으로 구성되어 전투력이 강했다는 점에서 충효군과 삼별초의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 그들을 이끌던 완안진화상 역시 금나라 후기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몽골과 싸우면서 지도력과 전투력을 인정받았고 그가 만든 충효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며 국가의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1228년 400명의 정예병을 이끈 완안진화상의 충효군과 8천명의 몽골기병이 정면으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금나라 정벌을 진두지휘한 수부타이는 몽골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초원과 평원을 누비며 수많은 적들과 싸워 패배한 적이 없는 장군이었는데, 이 싸움에서 몽골기병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금나라에서 물러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인해 금나라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각지에서 몽골군을 무찌르며 변량 일대를 포위한 몽골군을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충효군의 입지가 어땠는지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지에 흩어진 금나라군을 모아 변량 일대로 모으는 과정에서 금나라의 주력군은 몽골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변량으로 진군하던 금나라군은 몽골의 거듭된 공격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잔 상태에서 포위당했고, 몽골에서 파견된 군사들과 억지로 전투를 벌여 삼봉산에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완안진화상이 이끈 충효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지만 부하들을 살리기위해 완안진화상은 몽골군을 찾아가 항복했으며, 그가 무릎을 꿇지않자 그의 다리를 베어 억지로 주저앉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자 완안진화상은 잔인하게 살해당했지만 충효군은 살아남아 포찰관노의 지휘아래 금나라 황제를 호위하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금나라 애종은 도읍이던 변량을 버리고 귀덕 일대로 도망쳤는데, 포찰관노는 거짓으로 항복하는척 하며 몽골과 한족군대의 현황을 파악합니다.
몽골군이 3500명 정도에 한족병사들도 8천명 가량 포진된 상태에서 포찰관노는 450명의 충효군을 이끌고 밤에 기습해 몽골군을 전멸시켰고 한족군대도 공격해 명장인 사천택과 장유등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대부분을 해치우며 또다시 큰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렇게 망하기 일보직전의 금나라를 지키던 충효군이지만, 금나라 애종은 포찰관노를 싫어해 결국 몰래 제거했으며 충효군 역시 지휘관을 잃고 금나라 최후의 전투인 채주전투 이후로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 그곳에서 전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금나라 말기의 강력한 전투부대였던 충효군은 적은 숫자로도 많은 적들을 무찔렀으며, 아마 그 숫자가 조금 더 많았다면 금나라를 구할수도 있었겠지만 잇따른 지휘관의 사망과 제거로 구심점을 잃고말았으니 그들로만 역사를 바꾸기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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