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마지막을 알린 송산성전투

2024. 9. 22. 10:5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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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산해관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넘지 못했던 후금군이지만, 이후 북방의 몽골과 다른 민족들을 완전히 통합하고 정복하여 명나라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장성의 취약한 부분을 넘어 북방민족이 명나라를 습격하던 곳까지 후금이 파악해 대대적인 명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이전의 가뭄과 기후변화로 인해 굶주리던 만주족은 전세를 완전히 뒤집고 명나라를 몰아붙였습니다.

 

1636년 청나라를 건국한 태종은 대대적인 명나라 정벌을 감행했고, 아지커가 이끄는 청군은 장성을 넘어 북경을 포위하고 하북성 일대를 휩쓸며 56번 싸워 전부 이기는 전과를 올리는 와중에 부족한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10만이 넘는 포로를 이끌고 귀환했습니다.

2년 후에는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침공했으며, 58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46만의 포로를 잡았으며 획득한 금과 은의 숫자가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명나라가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후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장헌충과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관군과 싸우면서도 불리할때는 숨어서 저항하고 유리할때는 모습을 드러내 약탈을 일삼았으니 명나라 정부군이 제대로 토벌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나라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지 못했고, 국경수비를 위해 비축한 물자와 돈을 전부 빼앗겼으니 피해가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인 산해관에서는 명장 원숭환이 이끄는 정예군과 용맹하기로 이름난 관녕철기가 버티고 있어 청군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청나라도 큰 이득을 보면서 명나라에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키지 못하고 다시 장성을 넘어 후퇴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명나라의 숭정제가 원숭환을 전격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후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해버린 것입니다.

청나라가 원숭환을 이기지 못하자 숭정제와 원숭환을 이간질해 의심많은 성격이었던 숭정제가 원숭환을 직접 제거하면서, 많은 명군과 장수들이 이런 상황에 절망해 오히려 청나라로 투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청군을 괴롭힌 홍이포까지 넘어가 청군이 사용하게 되면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원숭환이 건설해 수비거점으로 삼은 영원성을 비롯한 모든 곳이 청군에 포위되었고, 숭정제는 당시 농민반란을 진압해 유능함을 보인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구원군을 파견했습니다.

 

명나라는 후방에 있던 포병과 화승총병까지 전부 동원하여 14만 정도의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청나라 역시 태종이 정예병을 이끌고 참전했고, 명나라의 주력군을 송산성 일대에서 포위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명나라에서는 군비문제를 들어 빠르게 싸워 승부를 내기를 주문했지만, 오히려 청 태종은 장기전으로 끌고가 명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포위했으며 겁에질린 장수들이 흩어져 산해관쪽으로 후퇴하다가 전부 각개격파당하고 말았습니다.

홍승주 휘하에는 얼마 안되는 병력만 남았으며, 송산성으로 후퇴해 농성했지만 물자가 차단된 상태에서 결국 내부분열로 성은 함락되고 명군은 학살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총사령관이었던 홍승주는 항복했고, 그 밑의 기라성같은 장수들은 거의다 전사했으며 명군의 사상자는 5만 3천을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명나라는 보유한 모든 정예병을 잃고 완전히 공격에 대한 의지가 꺾였으며, 이후 이어지던 강화조약이 결렬된후 쳐들어온 청군을 막지못하고 북경일대가 약탈당했는데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송산성전투 2년 후에 남쪽에서 올라온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을 막지 못하고 멸망하며 숭정제는 자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으니, 이 모든것은 원숭환을 믿지 못하고 제거한 숭정제에게 돌려도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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