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8. 11:44ㆍ역사
원래 동양권에서는 세종이라는 묘호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나라의 국력을 크게 키워 사방을 정벌한 한무제 역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의 힘을 크게 키워 다시한번 중원이 통일되는 기반을 닦은 후주의 시영 역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특히 쇠퇴하던 금나라를 크게 일으켜세우고 강국으로 끌어올린 완안옹 역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아 후손들이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 유독 명나라에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가정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암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가정제는 1507년 태어났는데, 원래 황제가 될수 없는 핏줄이었습니다.
정통 황족이 아닌 제위에서 밀려난 방계 혈통을 가진 가정제였지만, 전임 황제였던 정덕제가 방탕하게 놀아나다가 물에 빠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니 운좋게 황위를 가정제가 1521년에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제가 가장 먼저 몰두한 일은 자신의 친부를 황제로 추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덕제의 아버지인 효종 홍치제는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일으켜세운 명군으로, 18년간 재위하면서 명나라의 중흥을 이끈 군주였기 때문에 홍치제의 양자가 되어 황제를 계승했다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가정제는 자신의 친부를 예종으로 추존하며 홍치제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낳은 가정제의 즉위였지만, 그래도 명석한 두뇌와 명민함으로 가정제는 조정과 백성들의 기대를 받는 군주였습니다. 특히 황제가 되기 전 보여준 그의 능력은 이런 기대를 키우는데 일조했지만,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모두가 알아차리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헌종 성화제는 도교를 신봉하여 많은 폐단을 낳았는데, 가정제 역시 도교 도사들을 조정에 불러들이고 큰 상을 내리는등 도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도사들이 직접 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만든 영약을 복용하고 도사들의 말을 믿는등 여러가지 큰 폐단을 낳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교에 통달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주는 재주를 가진 엄숭이 재상이 되었습니다.
엄숭은 대표적인 명나라의 탐관오리로 꼽히는 인물로, 정사를 돌보기 싫어하는 가정제를 대신해 거의 20여년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명나라의 쇠퇴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 홍치제의 중흥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매관매직을 비롯한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명나라가 이렇게 쇠퇴를 거듭하고 있을때, 바로 북로남왜라고 불리는 명나라의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방의 알탄칸이 변경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고, 결국 1550년에는 수도 북경이 포위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가정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그저 궁녀들을 거느리고 도사들이 만드는 단약을 복용하여 오래 살 궁리만 했습니다.
거기에 남쪽에서는 왜구가 창궐하여 절강과 복건 등지에서 양민을 해치고 명나라 정규군을 궤멸시키는 등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척계광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 등장하여 왜구를 격파하고 근거지를 점령해 왜구를 진압했으며, 이후에는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 북방의 몽골군을 막는 쾌거를 거두어 결국 북로남왜의 근심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가정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선을 통치하던 중종과 인종, 명종 재위기간과 겹치는 모습입니다.
조선의 인종은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평가하기 어렵긴 하지만, 중종과 명종은 조선의 대표적인 암군들로써 그나마 기강이 잡혀있던 국가를 좀먹고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건 가정제와 비슷하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왜구가 창궐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해안지대를 휩쓸고 다녔지만 한동안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으니 이런 무능력한 모습도 비슷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결국 가정제는 1567년 무려 45년간 재위하다가 죽었는데, 굉장히 신기하게도 도사들이 만든 수은이 잔뜩 들어간 단약을 그렇게 먹고서도 50년에 가까운 재위기간을 보여줬습니다.
당나라의 황제들 중에서는 능력있던 헌종과 선종이 모두 이런 단약을 먹고 수은에 중독되어 사람을 죽이거나 성격이 변하는 등 여러가지 부작용을 겪었던 것에 비해, 가정제는 이런 모습도 없이 무려 45년간이나 재위하다가 죽었으니 그의 체력이 정말 강철처럼 튼튼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죽은 가정제는 끊길뻔했던 명나라의 황통을 이었다는 이유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간 동안 국가가 안팎으로 시끄러웠고 부정부패가 판을 쳤으며, 엄숭이 국정을 농단하고 궁녀들마저 가정제를 죽이려 드는 등 여러가지 막장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세종이라는 묘호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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