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영조를 괴롭힌 컴플렉스와 이인좌의 난

2022. 8. 21. 11:3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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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군주였던 숙종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한때 왕후였지만 사사된 장희빈이 낳은 세자와 천한 무수리에게서 얻은 연잉군, 전부 두명의 아들이었는데 이 둘은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듯 합니다.

당시 소론과 남인들은 세자를 지지하고 있었고,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여 왕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숙종이 죽으면서 세자가 그 뒤를 이어 20대 군주 경종으로 즉위합니다.

 

우선은 경종을 필두로 한 소론과 남인들이 이긴 것으로 보였지만, 경종은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인지 몸이 약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특히 약한 몸 덕분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잔병치레로 인해 앓아눕는 일이 많았다고 하니, 이런 모습을 보면 연잉군과 노론들이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결국 경종이 앓아누운 상태에서 당시 경종을 대신해 국사를 처리하던 연잉군이 상태가 잠깐 좋아진 왕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이것을 맛있게 먹은 경종이 잠시 숨을 돌리는듯 했지만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며 급작스럽게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연잉군이 노론의 바람대로 조선의 21대 군주 영조로 등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종이 총애하며 권력을 잡았던 남인들과 소론들이 다시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며, 여기에서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만들어집니다.

 

원래 한의학적으로 살펴보면 게와 감은 상극의 성질을 가졌다고 합니다.

둘다 서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평소 속이 찬 사람이 개와 감을 먹으면 크게 원기를 상하게 되고, 배탈이 나서 사망에 이를수도 있다고 전해지니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진상하여 먹게한 연잉군의 잘못 혹은 고의가 이런 독살설로 번진듯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즉위 초부터 영조는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생모가 천한 무수리였다는 사실은 약점이 될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영조를 괴롭힌 것은 형을 죽게만들고 자신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경종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이 승계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이 올린 음식을 먹고 결국 나흘만에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조는 비난을 피할수 없긴 합니다.

거기에 이미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인재등용을 약속하며 유명한 탕평책을 들고 나왔지만, 영조와 조정에 대한 불신이 커진 남인들과 소론들은 불만이 커져갔고 결국 이것이 반란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미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광좌를 필두로 한 소론정권이 다시 권력의 핵심이 되었지만, 이미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1728년, 영조가 집권한지 4년만에 터진 이 대규모 반란은 결국 이렇게 터져버린 것입니다.

반란군에 의해 대원수로 추대된 이인좌는 충청도의 중요한 고을인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경기도로 진군합니다.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인 박필현이 이끌고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 경상도의 군사는 정희량이 인솔하여 인근의 성들을 점령하며 대규모로 일어난 것입니다. 마침 지방을 수비하는 속오군이 완전히 약체화되어 자체적인 방어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확실히 반란군들에게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평안도와 한양에서 호응하여 거병하기로 한 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어 토벌군의 역량이 남부지방에 집중된 것은 반란군에게 악재로 작용합니다. 

 

거기에 당시 토벌군을 이끌던 오명항은 오랫동안 실전경험이 없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반란군을 회유하여 다시 항복시키는 작전을 사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반란군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고 합니다.

거기에 경기도로 진입한 이인좌가 오명항에게 패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고, 안성에서 포위되어 결국 이인좌가 생포후 압송되어 처형되니 가장 가까이서 영조를 압박하던 주력군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전라도의 반란군 역시 배신으로 금방 와해되었지만, 경상도 안음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군은 7만에 가까운 숫자를 바탕으로 가장 오랫동안 저항합니다. 하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황선이 곳곳의 약한 속오군을 지휘하여 반란군의 진군을 막고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경상도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니, 결국 조선 후기에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이 이렇게 진압됩니다.

 

이렇게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이 진압되긴 했지만, 영조는 반란진압에 직접 참여한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내려보내며 민심을 다독이는데 힘썼습니다.

다만 중앙정계에 진출했다가 밀려난 북인과 남인의 근거지였던 경상도는 불만이 높은 지역이었고, 결국 반란 진압 후에도 이런 상황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경상도에서는 고관대작이 한동안 나오지 않을만큼 차별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모든것이 좌절된 소론의 강경파와 남인들이 과거에 응시할때 일부러 답안지에 영조를 비난하는 내용을 써서 제출했고, 특히 일부는 경종이 죽은이후 게장을 먹고 있지 않다며 영조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소론과 일부 남인이 참여한 반란으로 인해 소론의 세력이 완전히 꺾여버렸고, 남인은 워낙 위축된 상태에서 더욱 쪼그라들다보니 상대적으로 노론이 큰 지분을 가져갈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영조가 탕평을 외쳐봤자 노론만 득실거리는 중앙정계에서 뽀족한 방법이 없었고, 이것이 손자인 정조때에서도 해결되지 않은채 결국 순조가 즉위하며 한 가문이 모든것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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