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강동8주 개척과 그땅의 역사

2022. 7. 28. 14:59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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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 후에도 굉장히 땅이 작았으며, 북쪽 국경이 압록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배워왔습니다. 거기에 고려초에 개척하여 획득한 강동6주 또한 흥화진과 귀주를 비롯한 여섯개의 고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송사에 강동6주를 언급한 기록이 있어 그렇게 전해진 것이고, 고려사절요나 동국강목같은 우리 자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강동6주가 아닌 강동8주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993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을 압박하고 있던 요나라는 고려를 침공합니다.

소손녕이 자칭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다고 하지만 안융진에서 고려로 망명한 발해유민 대도수에게 크게 패하고 전세가 꺾인 상태에서 서희가 요군 진영으로 들어가 결국 강화를 맺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고려와 요 사이를 막고 있던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는 것에 합의했고, 그 과정에서 고려가 획득한 영토가 강동6주라고 알려진 강동8주의 땅입니다.

 

이때 설치한 고을들이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龜州)·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선주(宣州)·맹주(孟州) 라고 하는데, 이 내용과 송사에 적힌 내용이 맞지 않는다 하여 강동6주로 축소하여 지금까지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던 것입니다.

거기에 그동안 이 강동8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윤관이 새로 개척한 땅은 평안도가 아니라 지금의 요령성 요양과 개원 사이로 추정된다는 것이 새로나온 주장입니다.

 

이렇게 고려가 새로운 강동8주를 개척하여 요새화하고 병력을 강화하자 결국 이곳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1010년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합니다.

이때는 권신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뒤숭숭했고, 요군을 무찌르러 출정한 강조가 기마병을 이기기위해 검차를 이용하여 선전했지만 결국 통주에서 패하고 붙잡혀 처형당합니다.

 

당시 요 성종이 강조를 회유하려 하였지만 고려의 신하로 죽겠다며 버티었고 결국 처형당하며 고려가 망하는듯 보였지만, 흥화진에서 요군을 막아내던 양규 장군이 1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밖으로 나와 곳곳에서 게릴라전으로 요군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이때 요 성종은 서경을 포위하고 있었고 그 길목에 있던 곽주를 6천명의 요군이 지키고 있었지만, 양규의 활약으로 이들을 전부 죽이고 곽주성을 되찾아 그 안에 잡혀있던 고려인 포로들을 모두 구해내는 전과를 올립니다.

결국 개경을 불태우고 주변을 노략질하며 고려를 압박했던 요군이지만 이렇게 후방을 차단당한 채 고려의 입조만 확인하고 군대를 돌려 돌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양규와 함께 귀주를 지키고 있던 김숙흥까지 합세하여 곳곳에서 요군을 덮쳐 죽이고 고려인 포로들을 구해냅니다.

 

이렇게 양규와 김숙흥이 구해낸 포로만 3만명 정도에 죽인 요군의 숫자가 헤아릴수 없었다고 하니,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한채 요군이 온전하게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원래 요 성종은 쇠퇴하던 요나라를 재건하고 송나라와 북방민족을 제압하여 요나라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군주였는데도 고려와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이런 큰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이 이끈 고려군은 수적열세 덕분에 거란군에 포위당하게 되고, 도중에 구해낸 고려인 포로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위해 최후의 한사람까지 요군에 맞서 싸웁니다. 그렇게 양규와 김숙흥을 비롯한 고려군이 전멸하지만 요군의 피해가 심각했고 요군이 압록강을 건널때 흥화진을 지키던 고려군이 다시 기습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고려인들을 구해냈다고 하니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요군이 다시 고려에 침입하자 이번에는 상원수 강감찬과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막아섰는데, 개경을 노린 진군이 실패하고 후퇴하던 중에 귀주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이곳에서 고려군에 참패한 후에 두번다시 거란은 고려를 침입하지 못합니다.

 

다만 거란의 연이은 침입에 고려가 국경지대 일부를 상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진족이 흥기하여 거란을 멸망시키고 있을무렵인 1117년, 고려가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지만 거란에 빼앗긴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기위해 여진과 외교전을 벌입니다.

요군의 수비가 너무 엄중하여 고려군이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금군이 인근에까지 다다르자, 성안에 있던 거란군은 고려에 이 두성을 넘기고 도망가버렸고 그렇게 고려는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아 포주성의 이름을 의주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여진족의 금나라가 내원성은 다시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후 내원군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통보해왔다고하니, 금나라와도 강동8주 영유문제로 고려가 꽤나 고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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