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당을 괴롭힌 신라구

2022. 7. 9. 11:38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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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에 대해서는 우리도 충분히 그 해악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고려말에 쉬지도 않고 쳐들어와 큰 피해를 입혔고 약탈과 방화, 강간 등을 일삼으며 고려에 치명타를 가한 왜구 덕분에 이성계가 고려를 찬탈하고 조선을 세우는데 일조했지만 조선에 들어서도 이런 왜구의 침입이 그치지 않아 골치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왜구 이전에 신라말엽 일어난 신라구에 대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라말부터 시작된 왕위 쟁탈전과 함께 신라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의 귀족들과 호족들이 자립하는 과정에서 정쟁이 빈번하고 혼란이 끊이지 않자 이때 생겨난 많은 유민들이 해적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만명의 군졸을 얻어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했을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결국 장보고가 신라조정의 왕위쟁탈에 휘말려 암살되고 청해진이 폐지된 후로는 이 해적들을 막는 세력이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특히 후삼국에 접어들며 견훤의 세력 안으로 들어간 수달과 능창 등의 해적집단을 보면 이들의 전투력과 행동반경이 놀라웠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해적세력이 있어서인지 왕건이 나주를 함락하고 백제에 큰 타격을 입힌 이후 이것을 보복하기 위해 수군으로 고려를 공격합니다.

 

932년 견훤의 부하 상귀는 수군을 지휘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위협하고 곳곳을 약탈하며 말을 빼앗는 등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때는 고려가 곳곳에서 백제군을 연파하며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수군을 동원한 싸움에 고려조정이 당황하였고, 이후 왕만세가 파견되어 백제군과 교전하였지만 패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무래도 신라말부터 활약한 해적집단을 고려의 정규군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이들 해적이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이들은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신라와 일본, 당의 해안가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등 큰 피해를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일본의 기록을 보면 규슈지역 일부가 사람이 살수 없는 무인지대가 되어버리는 피해를 입자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인의 입국을 제한하고 사는곳을 제한하는 등 신라구와 신라인의 연계를 차단하는 방법도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규슈지방은 무역을 위해 눌러앉은 신라인들도 많았고, 신라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주로 공격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고대부터 왜구가 출몰하여 신라 해안을 공격한 것은 유명한 일이지만 이렇게 신라인들이 돌변하여 일본과 당의 해안을 공격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인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과 당을 습격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해적이 출몰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이런 해적들을 신흥세력인 왕건과 견훤 등이 격파하고 민심을 안정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이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사서들이 별로 전해지지 않고, 그마저도 고려 초의 거란전쟁에서 타버리는 바람에 일본측의 기록과 비교해볼 내용이 없는게 아쉽긴 하지만 당시 서해와 남해를 휘젓고 다닌 신라해적들의 해악 역시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후 고려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적의 활동이 감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해적집단의 출현은 사회가 혼란하고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생겨나는 경우가 많으니, 사회가 안정되어가면서 이런 해적들 또한 토벌과 회유를 통해 사라져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동안 이런 해적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집단은 배를 타고 고려와 일본을 습격한 동여진 해적 정도 뿐이었지만 이후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힘을 잃으며 통제력을 잃게 되자, 이때부터 생겨난 왜구들이 고려와 원나라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히는 일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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