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4. 13:16ㆍ역사

지도출처 : https://amarese.tistory.com/entry/%ED%98%95%EC%A3%BC
삼국지에서 후반부에 유비가 장악하게 되는 익주는 굉장히 중요하고 풍요로운 땅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하며 익주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는데, 그래서인지 유비는 조각조각 갈라졌던 형주땅에 웅거하면서 익주로 들어가 그곳을 지배하던 유장을 쳐죽이고 사천지방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관우가 위군을 공격하다가 오나라의 육손에게 병력을 전부 잃고 목이 조조에게 보내지는 최후를 맞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비에게 남아있던 모든 형주땅이 조조와 손권의 수중으로 들어갑니다.
분명 제갈량이 설파했던 익주의 중요성은 형주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방기지의 역할이었을텐데 이렇게 형주를 잃으면서 익주만 남은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거기에 유비가 오나라에 복수를 하겠다며 이릉에서 주력부대와 수많은 인적자원들을 태워먹은 덕분에 불세출의 영웅 제갈량마저도 익주를 근거로 몇번의 북벌을 한 것이 전부였고, 결국 이후 17만 대군을 이끌고 총력전을 편 결과 유비가 건국한 촉한정권은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촉 정벌은 굉장히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병사들을 끌고 들어간 등애가 험준한 길을 간신히 넘어 면죽관에서 제갈첨이 이끄는 촉군을 격파하고 성도에 있던 유선의 항복을 받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만, 결코 쉬운 원정이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전쟁이었습니다.
분명 삼국지에 묘사된 익주는 들어오는 길이 험하고 지키기 쉬운 지형이라 금성탕지의 요새라는 평가가 있지만, 이후 전개된 사천지방의 역사는 굉장히 기구합니다.
이후 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서진왕조는 황족들끼리 서로 잡아죽이는 치열한 내전을 펼친 결과 이민족에게 수도인 낙양을 함락당하며 멸망합니다, 이후 익주에는 또다른 이민족인 저족의 족장인 이특이 성도로 진입하여 성한이라는 국가를 세우며 지방정권으로 할거합니다.
이 성한정권은 이특의 뒤를 이은 이웅이 굉장히 괜찮은 정치를 하면서 번성합니다.
30년 정도의 집권기간동안 안정된 국가를 만들긴 했지만 그 이후 후손들이 서로 골육상쟁을 일삼아 세력이 바로 쇠퇴해버렸고, 347년 동진의 실권자인 환온이 정벌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바로 멸망합니다.
분명 이전에 위나라가 촉한을 정벌할때는 17만 정도의 대군을 동원하여 간신히 점령한 익주였지만 이때는 환온이 겨우 7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점령할 정도였다니 정말 이때의 성한정권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알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후 익주는 남조에 예속되어 있다가 소연이 세운 양나라 말엽에 익주자사로 있던 소기는 당시 강릉에서 황제를 칭하고 있던 소역과 싸워 패하고, 근거지였던 익주는 인접한 북주의 손에 넘어가고 맙니다.
그렇게 이후 역사에서 눈에 잘 띄지 않던 익주는 당나라가 907년 멸망하고 천하가 다시 분열되었을때 왕건의 손에 의해 전촉이라는 국가로 독립합니다.
이 전촉을 세운 왕건은 당시 고려를 세운 왕건과 비슷한 활동시기에 국가를 건설했다는 점 때문에 혼동되기도 하는데, 나름 경제를 발전시키고 산업을 일으키는등 업적이 있긴 했지만 오대의 한 국가인 후당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934년 후당이 다시 분열하고 혼란할 무렵 절도사인 맹지상이 다시한번 익주를 근거지로 후촉을 세워자립하는데 성공합니다.
맹지상이 죽고 자리를 이어받은 맹창은 제도를 개선하고 어진이를 등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노렸고, 여러가지 노력을 통해 익주를 다시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송나라군의 침입을 받아 결국 다시 멸망하게 됩니다.
송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했지만 국방력이 약해 화북을 여진족의 금나라에 빼앗겼는데, 그 와중에 국경이 닿아있는 익주를 자주 금나라군이 침입했습니다.
특히 금나라가 몽골의 침입을 받아 땅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왔을때는 익주를 송으로부터 빼앗아 근거지로 만들 생각으로 특히 자주 쳐들어와 산업기반과 농경지들이 황폐화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금나라가 송과 몽골의 협공으로 멸망한 뒤로는 몽골이 직접 송나라에 침입했는데 1235년의 기세는 정말 대단하여 익주 전 지역이 함락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송의 마지막 명장인 맹공이 익주로 들어와 산성을 쌓고 방어전략을 다시 수립했으며 피해를 복구하는데 주력해 몽골이 뚫기힘든 방어선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몽골의 칸인 몽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익주를 침입했을때 곳곳에서 몽골의 기마부대의 진격을 저지했고, 결국 험준한 위치에 있던 조어성을 함락시키지 못한채 대칸인 몽케마저 전사하여 몽골군이 철수하게되니 익주가 송나라의 수명을 10년가량 연장시켰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그 후 명나라가 다시 천하를 통일했지만 말기에 여진과의 전쟁이 길어지며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익주에는 장헌충이라는 농민반란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익주를 석권한 장헌충은 대서라는 국가를 세우며 자립을 꾀했지만 명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들어온 청군이 침입하자 이를 막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장헌충과 청군 모두가 익주지방의 사람들을 대규모로 죽였고, 그로인해 곳곳의 집과 농지가 텅 비는 일이 많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결국 장헌충이 죽긴 했지만 각지에서 잔존세력들이 청군과 교전을 벌였고, 이후 13년이 지나서야 익주의 모든 지역이 청나라의 손에 온전히 들어갑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재산을 잃었는지 가늠할수조차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런후 1940년대까지 일본과 싸우던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대학살이 일어난 남경에서 익주의 중경으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곳곳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중경지역에서 일본과 맞서싸운 기억 덕분에 나중에 중국 공산당에 모든 영토를 내주고 익주로 축소되었을때도 이곳만은 반드시 지키려 했지만, 결국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장개석이 비행기를 동원해 자신의 정예부대와 장비를 가지고 익주를 떠나게 되며 중국의 국공내전은 막을 내립니다.
분명 이 익주지역은 침입하기 어렵고 지키기는 쉬우며 농업생산량도 많은 금성탕지의 지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제갈량도 익주를 중시했고, 이곳을 가져야만 천하를 노려볼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 이후 익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 이곳이 침입하기 어려운 험준한 곳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렇게 공략하기 힘든 익주였지만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침입하기도 쉬우면서 거의 무주공산으로 주워먹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삼국지연의의 과장과 허풍이 익주지역을 지나치게 포장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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