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최후의 명장 맹공

2022. 5. 28. 12:46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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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공(孟珙): 남송에서 악비보다 뛰어났던 장수

글: 육기(陸棄), 손옥량(孫玉良) 소련에 D. A. Volkogonov박사라는 유명한 군사전문가가 있었다. 그는 <스탈린: 승리와 비극>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다. 그의 2차대전에 대한 연구는 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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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당시 북방의 개봉에 수도를 정한 송나라지만, 1126년 금나라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개봉이 함락됩니다.

이미 송나라의 전신인 후주시절에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고쳐쌓은 개봉성이지만 당시 무능한 황제였던 흠종의 멍청한 대처로 인해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변량성이 함락되며 송나라는 멸망하고 남은 황족과 군사들이 강남으로 도주하여 남송을 재건하게 됩니다.

 

이후 북방의 영토를 할양받은 금나라와 남쪽으로 밀려난 송나라는 전투를 자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송나라는 밀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송의 권신이었던 한탁주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북벌을 시도했다가 정예병사만 모두 날리고 처형당해 목이 금나라로 보내지는 굴욕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송나라가 밀리는 과정에서도 예전 악비와 함께 싸웠던 맹안의 후손인 맹종정이 고군분투하며 송나라를 지켰습니다. 특히 몽골이 흥기하면서 금나라의 도성 중도를 함락시키자 금이 남쪽인 개봉으로 천도했는데, 이때 금은 송과 손을 잡고 몽골과 싸우기보다는 남쪽의 송을 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으로 자주 쳐들어왔습니다.

이때에도 맹종정은 양양 등지에서 금나라군을 크게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그의 아들인 맹공이 실전경험을 많이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사격술이 뛰어나 금나라의 대장을 여럿 쏘아죽였다는 기록이 보이니, 확실히 뛰어난 무장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북방에서 피난온 사람들로 조직한 충순군이라는 부대를 이어받았고, 그 다음부터 맹공은 뛰어난 전과를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금나라가 천도했던 변량성이 함락되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자 송이 지키고 있던 사천지방을 빼앗아 재기하려는 생각으로 이곳을 공격해왔는데, 맹공이 출정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합니다.

 

이제 완전히 수세에 몰린 금나라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망하면 분명 송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여러차례 공격받은 송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맹공을 파견하여 몽골군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됩니다.

결국 체주성이 함락되고 금 애종은 자살했으며, 황위를 이은 완안승린마저 전사하니 금나라는 건국한지 100여년만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송나라에서는 옛 도읍인 변경을 수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졌고, 결국 송군이 먼저 몽골을 공격하여 이곳을 빼앗긴 했지만 바로 반격받아 고스란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송나라가 먼저 몽골을 공격한 것을 구실로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1235년 몽골은 전군을 동원하여 송나라를 전면 침공하였고, 세 방향으로 군대를 나누어 진격하면서 초토화 작전으로 송나라의 경제기반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작전을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사천지방의 중심지인 성도가 함락되고, 금나라가 끝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양양도 함락되었으며 맹공이 주둔하던 곳까지 몽골군이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맹공은 강릉성에서 크게 몽골군을 격파하고 양양성도 수복했으며, 황주전투에서는 몽골의 전투선단을 모두 불지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렇듯 형주지방에서 몽골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맹공은 사천지방으로 이동하여 몽골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며 다시 잃어버린 영토를 전부 되찾게 됩니다.

 

당시 몽골군은 동북아시아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금나라의 주력군을 삼봉산에서 전멸시켰을 정도로 강한 군대였으며, 지휘관인 무칼리는 칭키즈칸이 신임하는 맹장이었는데도 맹공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고 철수한 것입니다.

특히 군사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곳곳의 방어능력을 키우는 데도 일가견이 있던 맹공이기 때문에 곳곳에 수비를 위한 산성과 성채를 지어 사천지방을 완전히 요새화하는데 성공합니다.

삼국지에서는 분명 진입하기 어렵고 함락시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평가가 있던 사천지방이지만, 이후 아무나 들어가도 함락되는 곳이 되어버렸는데도 이곳을 다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버린것입니다.

 

결국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면서 몽골군이 패잔병을 이끌고 철수했고, 이 틈을 타서 맹공은 오히려 북진하여 곳곳의 요새들을 점령했고, 유민들을 받아들여 자체적인 방어력을 높이는데 성공합니다.

다만 너무 높은 전공들을 올리다보니 송나라 조정에서 군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견제를 받기 시작했으며, 당시 하남지방이 송나라에 항복하려 했지만 조정이 의심끝에 항복을 받아주지 않자 그렇게 북벌을 주장하던 맹공은 화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최강 몽골군을 그렇게 막아내던 맹공은 너무 허망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남긴 방어선과 곳곳의 요새들은 이후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수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몽골이 여러차례 송나라로 밀고 내려오는 과정에서도 맹공과 함께 싸우던 부하들과 유민들은 곳곳에서 몽골군을 잘 막아내었고, 특히 몽케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사천지방에서는 끝까지 버티며 결국 몽골의 칸까지 죽게만드는 전과를 올렸으니 실로 맹공이 남긴 유산은 엄청났다고 볼수 있습니다.

 

비록 1279년 송나라의 최후의 보루였던 양양성이 함락되고 수도인 임안마저 함락되며 멸망을 맞았지만, 맹공이 만든 사천지방의 산성들과 요새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며 결국 모든 성안사람들의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항복하게 되니 송나라의 마지막은 맹공이 만든 유산들이 함께 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송나라로 밀고 내려온 몽골이지만, 맹공이라는 명장이 막아낸 덕분에 송나라는 50여년 정도를 더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몽골군은 쉽게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강남지방을 접수했을것이며, 당시 전쟁중이던 고려에 집중하여 우리민족의 명백이 끊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맹공이 50여년간을 버틸수 있는 힘을 송나라에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려에 집중하지 못하고 송나라와 오래 싸우게 되는 몽골이 결국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화의하게 되니, 맹공 또한 우리역사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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