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종

2022. 5. 26. 13:46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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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조선의 세종을 부를때 세종이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편이고, 대부분 세종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조선의 세종은 남긴 업적도 많고, 훈민정음을 창제해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군주이긴 합니다.

그렇긴 해도, 바로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종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며 역사교과서에서도 최충의 9재학당으로 대표되는 사학과 관학을 설명하며 당시의 군주였던 사실로 적혀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려의 문종은 훨씬 큰 업적을 남긴 군주입니다.

특히 당시 고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소국이 아니었고, 여진과 약소민족들을 제후로 거느린 천자의 나라였습니다. 거기에 아버지인 현종이 고려에 쳐들어온 요나라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무찔렀기 때문에, 제위에 오른 이후에도 요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 또한 마음대로 할수 있었습니다.

 

1046년 등극한 문종은 형인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황제로 등극합니다.

물론 12대 정종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동생인 문종의 자질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형이 동생에게 제위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고려는 외왕내제, 국외에서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국내에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해서인지 고려사에 적혀있는 문종의 시호는 문종 인효대왕이라고 나와있지만, 당시 문종시기에 만들어진 중앙귀족 이자연의 묘지명에는 문종을 성황제라 부르고 있으며 부석사원융국사비에서는 황상과 태평천자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발해의 정효공주의 묘에서 발해의 군주를 황상이라고 부르고 있는것과 동일해 보입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때, 발해와 고려 모두 황제를 칭한 천자국이었음이 드러납니다.

 

문종은 고려의 황제가 되고난 이후 법을 재정비합니다.

우선 사형수들에 대해서는 세번 재판을 받게하는 삼복제를 실시했고, 죄수를 심문할때는 세명의 법관을 입회시키는 삼원신수법을 적용해 백성이 억울한 재판을 받지 않게 노력했습니다.

이런 일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재위 후반부에 반란모의가 있었지만 관련자를 전부 죽여버린 조선시대와는 달리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모자만 귀양보내는 수준으로 마무리하게 되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군주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까지 지방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는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앙집권을 강화합니다.

이미 성종시기에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했지만, 문종시기에는 좀더 세부적인 중앙집권을 위해 향리의 자식들을 수도인 개경으로 불러 인질처럼 잡아두는 선상기인법을 실시하여 더욱 지방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또한 당시 중앙귀족들을 견제하는 의미로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설치합니다.

그래서 북쪽의 서경, 수도인 개경, 남쪽의 남경의 3경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3경제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후 문종이 설치한 남경은 고려말에 한양부로 격하되었다가 조선이 들어서며 새로운 수도로 삼았으니, 수도 서울의 역사는 문종이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토지제도 또한 이 시기에 재정비됩니다.

고려 초부터 시행되던 전시과를 손본 경정 전시과가 이때 시행되어 현직 관료들에게만 전지를 지급하게 됩니다. 거기에 거듭된 전쟁으로 무반들의 위치가 올라감으로써 처우도 많이 개선되었고, 지방의 향리들에게도 전지를 지급하여 어느정도 괜찮은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서 피해를 입은 농민을 구제하는 재면법과 피해 정도에 따라 세금을 줄여주는 담험손실법을 제정하였으며, 땅을 등급별로 나누어 세금을 매기는 전품제까지 일반 농민들을 위한 정책 또한 많이 실시했습니다.

 

거기에 이 시기는 요나라의 약체화가 진행되는 시기였고, 송나라 또한 고려와 재수교를 통해 거란을 제압하려는 생각으로 고려와의 외교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외교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요나라가 고려 국경 부근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이것을 항의하는 사신을 보냈고, 오히려 요나라에서는 트집을 잡지 못한채 우호관계를 지속하게 됩니다. 혹시나 고려와 송이 다시 수교하지 못하도록 이런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요나라지만 정작 고려와 송이 수교하게되자 크게 항의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요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송나라 또한 이런 상황에서 다시 고려와 수교하게 되었지만 요나라에서도 고려의 국력이 커지자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고려가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저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로 일관한 조선 세종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명나라의 공녀 요청과 금은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명의 기분을 거스를까봐 노심초사하며 백성을 닦달하며 수탈하던 조선의 세종과는 달리 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고려의 이익에 따라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구사한 문종은 이 점에서 비교불가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문종은 재위기간 내내 여진족과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특히 고려 복속하던 동여진이 고려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모두 진압했으며, 말을 듣지 않는 여진족은 모두 무력을 동원해 쓸어버렸으니 이때 거의 모든 여진족들이 고려에 복속되어 충실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특히 요나라의 내정이 어지러워지며 요나라로부터 받은 벼슬을 버리고 고려에 귀속하려는 여진족들이 넘쳐났다고 하니, 당시 고려의 위세가 어땠는지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부해온 여진족을 고려의 오등봉작제에 의거한 벼슬을 내려주니 이때야말로 고려만의 독자적인 천하가 다시한번 완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종에게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경정 전시과를 통해 현직관료들에게 전지를 지급하는 방향으로 바꾸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중앙의 문벌귀족을 강하게 만들고 부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갈수록 지급할 토지는 줄어들고 귀족과 공신들의 숫자는 늘어나니 결국 이것이 고려의 재정압박 요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흥왕사를 비롯한 대규모의 사찰을 지으면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지운 것입니다.

개경 인근에 지었다는 흥왕사는 당시 충실한 고려의 국력으로 충분히 감당할수 있는 정도였다지만 그래도 큰 돈을 들여화려하게 치장하고 흥왕사에 온갖 특혜를 안겨주어 훗날의 근심거리가 되어버리니 이런 점에 있어서는 비판을 피할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 문종의 뒤를 이은 군주들이 단명하는 바람에 문종의 아들인 계림공은 조카를 내쫓고 양위받아 군주의 자리에 올라 고려 숙종으로 재위하게 되니, 이점에 있어서는 조선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보위를 찬탈한 것처럼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좀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잘못 또한 있다고 봅니다.

 

이렇듯 고려 문종은 조선 세종 못지않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많은 부분이 묻혀있는 상태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그저 좋은 시절을 보낸 군주였다는 짤막한 설명이 전부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상태일 뿐입니다.

하지만 고려 문종은 고려만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다시 세운 군주입니다. 또한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추진했고, 빛나는 외교적 성과와 군사작전으로 고려의 국력을 사방에 과시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문종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집중적으로 폄하되고 왜곡된 고려사를 다시 되살리는 것이 가장 시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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