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마지막 대승, 사수전투

2022. 5. 21. 13:4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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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백제가 당과 신라의 기습으로 멸망합니다.

웅진에서 항거하던 의자왕이 부하의 배신으로 사로잡히며 당으로 압송되었고, 각지의 백제 부흥군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수도가 함락되었으니 백제는 700여년의 사직을 뒤로 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당으로써는 당나라 태종이 요동에서 겪은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백제를 친 것이고, 원래 목표였던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됩니다.

661년 고구려 원정군을 다시 편성한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과 중국 영남의 수군을 데려온 방효태, 그리고 유목민족들의 기병까지 전부 데려온 계필하력 등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 위한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당 태종이 친정했을때는 고구려의 난공불락이던 요동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안시성에서 참패함으로써 당나라가 크게 패전하고 쫓겨났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교훈삼아 요동의 방어선을 뚫기보다는 수군으로 직접 고구려의 평양성을 노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의 전쟁에서는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 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허용하지 않았을 압록 부근의 방어선이 뚫린 것입니다.

결국 원정길에 오른 당군이 전부 평양쪽으로 모이게 되고, 수도가 포위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고구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평양을 공격하던 당군은 점차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밀리게되고, 당의 변방을 외교술로 뒤흔들어 결국 계필하력이 이끌던 기병들이 후방의 방어를 위해 전부 회군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후에 당시 혹한으로 얼어붙은 사수에서 고구려와 당의 대회전이 벌어지면서 사수전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워낙 남아있는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고구려와 당군의 정확한 숫자와 전투 내용은 알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 영남지방에서 징집한 수군과 자신의 사병들, 그리고 아들들까지 전부 데려와 전투를 치르던 옥저도행군 방효태는 이 전투에서 죽게 됩니다. 그와 함께 방효태의 아들들과 병졸들도 전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확실히 고구려군이 엄청난 전과를 올린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특히 당군이 얼어붙은 사수를 건너고 있을때 고구려군이 바위를 날려 사수를 깨고 당군을 수장시켰다는 내용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고구려 말기에 일어난 전투중에서 가장 큰 승전으로 보입니다.

 

물론 안시성에서의 전투가 당 태종을 철수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긴 했지만 직접 고구려군이 나가서 싸운것은 아니고 성을 지키는 수성전이었으며, 수나라군을 전멸시킨 살수전투에서는 이미 전투의지를 잃어버린 패잔병들을 때려잡은 것이니 아무래도 사수전투가 가장 위급한 상태에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고 보는게 맞을듯 합니다.

 

660년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던 소정방이지만 연이은 전투에서 패하고 식량이 떨어져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특히 당의 원정군 중에 절반이 넘는 고급 지휘관들이 전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군이 전멸하지 않은게 다행일 정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보급품을 당군에 전해줬고, 식량을 받은 당군이 부리나케 도망쳤다고 하니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또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패잔병이 되어 도망치는 당군을 고구려가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고, 계속 추격하여 피해를 입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결코 편하게 돌아간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군은 그래도 살아남은 소수의 군대가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고구려의 후방으로 들어온 신라군은 퇴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군이 소규모로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신라군을 괴롭혔으며, 때마침 내린 큰 눈으로 가뜩이나 힘든 상황이 가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고구려군과 전투를 퉁해 만명의 군사를 죽이고 5천의 포로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그런 힘든 상황에서 당군을 추격하던 고구려가 신라군을 잡기위해 그렇게 많은 군사를 동원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포로 몇명을 잡은것을 과장해서 기록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특히 김유신이 신라군을 이끌고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지만, 나중에 고구려의 추격을 받아 힘들었다는 내용에서는 김유신이 어떻게 대처했다는 내용도 없으며 나중에 고구려군을 격파했다는 대목에서는 전혀 김유신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라군의 대승이라기 보다는 매복하고 있던 한 무리의 고구려군을 격파한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는 한동안 원정군을 편성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었고, 한동안은 대외관계에서 소극적으로 일관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가뜩이나 고구려와 가까운 산동과 하남지방은 원정군을 위한 식량을 공급하느라 황폐화되었다고 하며 두번에 걸친 대원정이 실패함으로써 다시한번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도 심해졌습니다.

신라 또한 백제 부흥군과 왜군을 상대하는데 벅차 고구려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으니 사수전투는 정말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승리였습니다.

다만 이후 사수전투를 이끌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연남생이 중앙정계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당으로 망명하게 되고, 결국 668년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는 과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여 고구려가 멸망하는 결말을 낳았으니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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