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수밖에 없었던 사마씨의 서진왕조

2022. 5. 14. 12:1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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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삼국지 후반에 등장하는 왕조로 유명한 서진왕조는 처음 시작부터 좋지 않은 행보를 보인 국가였습니다.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으로 위나라의 실권을 틀어쥐었고, 이후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로 정권이 넘어가며 조위정권이 후한왕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양을 받아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후한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우대하고 죽이지 않은 조위왕조는 나름 정통성이 있지만 이런 조씨를 탄압하고 권력을 얻었으며 황제까지 축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도 조위왕조는 한나라의 정통을 이은 왕조였고, 백성을 크게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에 후한왕조를 뒤엎었을때도 큰 저항이 없었지만 서진왕조가 들어서기 전에는 각지의 군벌들이 이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로 정통성이 부족한 왕조였습니다.

그래서 사마염은 즉위 초기에 꿩의 머리가죽을 이어 만들었다는 비싼 치두구를 진상받자 사치를 경계하겠다며 불질러버리는 연극을 할 정도였고, 실제로도 나름 정사에 힘을 쏟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서북쪽의 양주에서 일어난 독발수기능의 난 덕분에 이미 익주를 병합한 상태였지만 동오를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양주로 출병한 장수들이 연전연패하고 중앙정계 대신들의 암투 덕분에 이 난을 진압하는데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결국 어렵게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고 동오를 공격해 한창 자신만의 공포정치를 파고 있던 손호를 사로잡게 되니, 결국 이렇게 천하가 서진의 손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그래도 천하통일 이전의 사마염은 사치를 경계하고 정사를 열심히 돌보는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풀어진 채로 향략을 즐기게 됩니다. 이미 후궁이 많은 상태에서도 더욱 많은 처녀들을 잡아와 후궁으로 삼았으니 그 숫자가 거의 만명에 가까웠다고 전해집니다.

오나라의 후궁까지 전부 낙양으로 데려온 후 양이 끄는 수레에 몸을 맡기고 양이 멈춰선 곳에 있는 후궁과 밤을 지샜기 때문에 모든 후궁들이 양이 좋아하는 대나무잎과 소금을 거처앞에 뿌리는 촌극을 벌일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마염의 가장 큰 실책은 거의 백치에 가까웠던 태자 사마충을 교체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위관을 비롯한 충신들이 태자교체를 거론할 정도로 능력 자체가 없는 인간이었는데, 사마염은 이들의 간언을 듣고도 무시해버립니다. 결국 태자는 바뀌지 않고 사마염이 죽자 혜제로 등극하게 되는데 여기부터 서진왕조는 막장의 길을 달리게 됩니다.

 

황제가 무능한 백치이니 나라가 잘 돌아갈리가 없고 모든 실권을 황후인 가남풍이 틀어쥐게 되며, 이때부터 나라가 완전히 어지러워지고 국경지대의 이민족들이 힘을 키워 침입하는 빈도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결국 가남풍의 전횡을 보다못한 사마씨 황족들이 거병하여 가남풍을 죽였고, 황제까지 폐하고 조왕 사마륜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죽게됩니다. 

이후 황족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을 통해 결국 마지막에는 동해왕 사마월이 모두를 죽이고 회제를 즉위시키며 이 말도 안되는 팔왕의 난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느라 가지고 있던 정예병들을 모두 소모해버렸고, 마침 사마염의 시대에 천하가 통일되며 지방군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서진의 군사력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특히 16년간 계속된 팔왕의 난 동안 병력을 모을수 없자 변경의 이민족까지 끌어들여 내전에 이용했으며, 수도 낙양의 어린 남성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전쟁을 했고 이로인해 식량가격이 폭등하는 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맙니다.

 

하지만 서진왕조의 가장 큰 문제는 인명경시 풍조였습니다.

후한왕조부터 시작된 사회혼란과 전쟁으로 수많은 노예들이 생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귀족들이 노예를 죽여도 전혀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경쟁하듯 사람을 죽이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특히 귀족들이 술을 마실때 미녀가 손님들에게 술을 따라주는데 손님이 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 술병을 들고있는 미녀를 바로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부 성질나쁜 귀족들은 일부러 이것을 알고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여럿이 죽어나간 후에야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특히 귀족들의 사치풍조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습니다.

형주지방에서 부를 쌓은 석숭은 백성을 수탈하는데 그치지 않고 외국사신이나 외국상인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으며 길을 막은후 통행세를 거두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지니, 이 시기 귀족들의 만행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특히 황제의 외삼촌인 왕개와 누가 더 사치스러운지 경쟁했다고 하며 황제가 내린 하사품까지 때려부수고 더 좋은 물건을 주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어느정도의 사치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거기에 서진왕조의 건립 자체가 찬탈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교의 덕목인 충과 효를 사대부들에게 강조할수 없어 도교적인 사회분위기로 흘렀는데, 이 때 이른바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이 일제히 사마씨의 정치를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미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서진왕조의 통제력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고 그것이 팔왕의 난으로 아예 무너져버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307년 화북에 정착한 흉노족이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영가의 난이 일어났고, 이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잃어버린 서진왕조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낙양이 함락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며 멸망하게 됩니다.

그나마 강남에서 군사를 모으고 대치하던 사마예가 건강에 도읍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 동진이라고 불리지만 약한 국가로 남았고 나중에 유유에 의해 찬탈당하며 황족 사마씨가 전부 죽게되니 예전 조씨들을 죽이고 쌓은 업을 후손들이 고스란히 받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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