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를 좌지우지한 환관

2022. 4. 21. 13:4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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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은 원래 궁궐 내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위해 남성의 상징을 잘라 노예처럼 부리던 관직입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남성성이 없어서인지 물욕과 권력욕에 미친자들이 많았고, 그 결과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있는 진나라를 망친 환관 조고는 시황제의 죽음을 감추고,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던 부고와 명장인 몽염을 죽이면서 막내아들 호해를 옹립했습니다. 그 결과 2세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온갖 권세를 누렸으며 결국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채 50년도 되지 않아 멸망하게 됩니다.

 

후한시대에는 외척과 환관의 폐해가 번갈아가면서 극에 달했는데, 화제 시절에는 당시 외척 두씨의 횡포 덕분에 환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제거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외척 양씨가 황제를 독살하고 어린 황제를 세우는 등 전횡을 저지르자 환제는 다시한번 환관의 힘으로 이들을 전부 죽이고 다시한번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되찾아오는데 이 과정에서 환관의 힘이 너무 강해져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 나오는 십상시가 이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후한왕조를 멸망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입니다.

 

당나라 때에는 환관의 힘이 더욱 강해져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하는 일까지 간섭하게 됩니다.

당나라의 중흥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당 헌종은 당시 난립하던 절도사들을 제압하고 망해가는 당나라를 다시 일으켰는데, 말년에 약을 잘못먹고 환관을 매질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자 환관들에 의해 독살당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환관들이 중앙의 군사력을 장악하여 이를 바탕으로 황제를 세우고 폐위하는 일까지 전부 도맡게되며, 결국 당나라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황소의 난을 거쳐 멸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환관의 폐해가 가장 크게 드러난건 명나라 시대입니다.

몽골을 내쫓고 대륙을 다시 통일한 명나라에서는 창업자인 주원장이 환관의 정치참여를 막으면서 환관의 폐해를 막았지만, 그 이후 조카를 죽이며 황제가 된 영락제에 의해 환관이 실권을 가진 감시기구인 동창을 통해 정치를 하게 됨으로써 다시한번 득세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명 영종때의 환관 왕진은 매관매직은 물론 황제를 조종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오이라트와의 전쟁에 무리하게 나섰다가 죽게 됩니다. 그가 죽은뒤 조정에서 재산을 압수했는데 60군데가 넘는 보물창고에서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쌓여있었다고 하니 정말 엄청난 부정축재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무종때의 유근은 놀기만을 좋아하는 황제를 대신해 나라일을 맡아보며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그 결과 뇌물을 바치지 않는다며 지방민들을 핍박하는 바람에 이름도 어색한 뇌물의 난이라고 불리는 유육.유칠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2년간 이어진 반란 덕분에 명나라 조정은 2백만냥이 넘는 은을 지출해야 했고 지방의 재정은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글조차 모르는 인물이었던 희종때는 위충현이 실권을 잡고 목공밖에 모르는 황제를 대신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황제만 받을수 있었던 만세대신 구천세를 사람들에게 받으며 흐뭇해했다는 위충현이지만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에게 죽게되고 결국 이런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며 멸망하게 됩니다.

 

남성으로서의 성욕은 제거된 상태지만, 그것을 보상하기 위함인지 권력과 재물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 환관들이 많은 것을 보면 멀쩡해보이는 사람보다 오히려 거세된 남성이 더욱 무서울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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