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숨통을 끊은 대기근

2025. 10. 8. 11:4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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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후기의 가장 큰 사건이었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은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나라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또한 그나마 청나라가 버틸수 있었던 강남일대에서 일어났던 태평천국의 난이 10년 이상으로 길어지면서 더욱 청 조정의 재정난을 가속화했고, 그래서인지 남경을 수복한 청군은 수많은 태평천국과 관련된 이들을 죽이고 그들이 착취한 재산을 빼앗아 한숨을 돌릴수 있던 것입니다.

 

 

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만주인 귀족들은 전혀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족출신인 이홍장과 증국번이 각각 군대를 조직해 이들을 진압했으며, 그로인해 청나라 조정은 은퇴한 증국번을 대신해 실세로 떠오른 이홍장에게 실권을 넘길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이전에 황족인 숙순이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하긴 했지만 기존 귀족들에 의해 처형되면서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는데, 이홍장은 그것을 교훈삼아 정치적인 개혁보다는 군사적인 개선을 진행하는 양무운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 양무운동을 통해 청의 군대는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곳곳에 화약과 신식장비를 생산하는 공장을 지었고, 석탄을 채굴해 산업을 육성하며 해군전력에도 거금을 투자해 강한 군대를 육성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통해 진행해야 할 이 양무운동에 갑자기 제동을 거는 큰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청나라의 개혁이 진행되던 광서 2년인 1876년에 갑자기 하북일대를 중심으로 대기근이 닥치게 된 것입니다.

거의 백년만에 한번 올수 있는 극심한 가뭄으로 모든 농작물이 말라죽고, 모든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이 기근의 영향은 인근인 감숙성과 사천, 호북과 강소 일대까지 미칠 정도로 정말 극심한 대기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청나라의 재정이 아직은 양호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근이 1년만에 해결되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기근은 계속 이어져 1877년과 1878년 최고조를 찍은후 1879년까지 지속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식량이 없어 굶주리던 이들이 지쳐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행위로까지 이어졌으며, 나중에는 기력이 빠져 길이나 산기슭에 누워있으면 산짐승들이 내려와 이들을 또 잡아먹는 악순환이 계속되며 최소 9백만에서 최대 2천만의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이렇게 진행된 대기근 속에서 청나라 재정은 우선 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곳에 우선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전까지 적극적으로 진행되던 양무운동에는 소홀해질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적극적인 근대화 행보를 보인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군사력의 격차가 생길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한족인 이홍장이 실권을 쥐고 양무운동을 추진하다보니 그를 경계한 만주귀족들은 양무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게 방해하기 일쑤였고, 결국 이홍장이 확보한 해군건설자금을 회수해 이재민을 구휼하거나 더욱 급한곳에 쓰다보니 청군의 근대화는 그상태로 멈춰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그나마 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넘기고 난 뒤 그나마 한숨을 돌리며 동치중흥이라는 안정된 시기를 맞아 다시금 재기를 노린 청나라였지만, 1876년부터 이어진 정무기황은 실낱같던 청나라의 숨통을 끊어놓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과 재정을 허비한 청나라는 결국 일본과의 격차가 벌어져 훗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그동안 양성한 북양함대와 주력군이 전멸하며 망신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번에도 대기근이 국가의 운명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던 시기에도 대기근이 일어나 각지의 방어력이 약해지고 농민반란이 잇따라 청나라가 비교적 손쉽게 대륙을 장악할수 있었는데, 그 청나라마저 대기근으로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니 기근으로 봉건왕조들이 망한 공통점을 꼽을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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