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최고의 재상, 장거정

2025. 8. 17. 11:1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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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본격적인 쇠퇴를 알린 세종 가정제 이후로는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해지며 서서히 망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정제는 도교에 빠져 도사들이 올린 단약을 먹고도 수십년을 더 사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고, 북쪽에서는 타타르가 침입하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준동하는 통에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제의 아들인 융경제는 뛰어난 능력으로 아버지가 수습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했고, 해외무역을 제한된 수준으로 허용함으로써 당시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벌어들인 은을 무제한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융경제의 짧았던 5년여간의 통치는 명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재위기간이 길지 못했고, 그의 아들인 주익균이 즉위해 우리에게도 유명한 신종 만력제로 등극합니다.

 

 

만력제가 즉위하긴 했지만 열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탓에 그의 교육은 아버지인 융경제가 지목한 대학사 장거정과 환관 풍보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들은 성심성의껏 만력제를 지도했고, 그래서인지 그는 어렸을때부터 뛰어난 능력을 선보이며 명군이 될수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이게 됩니다.

 

1525년 형주 강릉에서 태어난 장거정은 잘 생긴 외모와 함께 뛰어난 능력으로 과거에 급제한후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가정제 연간 조정을 어지럽히던 엄숭에게 밉보여 은거하기도 했지만, 그를 실각시킨 서계의 눈에 들어 정계에 다시 들어가게 되며 이후 벌어지는 파벌싸움과 융경제의 죽음 등의 원인들이 겹쳐 결국 만력제때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장거정은 우선 세금제도 개편에 나섰습니다.

그동안 당나라 이후 시행되던 양세법은 너무 잡다한 세목과 더불어 지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명나라에 대규모로 유입되던 은을 이용한 일조편법을 시행하게 됩니다.

이 일조편법은 그동안 무분별하게 조세를 거두던 예전과는 달리 정확한 토지측량과 더불어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에게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일반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제도였습니다. 훗날 명나라가 망한후 들어선 청나라 역시 일조편법을 바탕으로 정비한 지정은제를 실시할 정도로 일조편법은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일조편법을 시행함으로써 그동안 지세를 내지 않던 지방 향신들에게 세금을 거두었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재정의 건전성을 꾀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사정은 급격히 호전되었습니다.

창고에는 10년치 식량이 쌓였고 국고에는 4백만냥의 은을 축적하는등 가정제 이후로 적자였던 명나라의 상황이 크게 좋아졌고, 그로인해 장거정은 향후 명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틸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범람하는 황하의 제방을 정비해 세금의 낭비를 막았고, 북쪽의 타타르와 동북쪽의 여진을 막기위해 명장 척계광과 이성량을 파견해 이들을 견제하는 한편 남쪽의 병사를 양성해 왜구를 막는 성과를 올렸으니 확실히 재능만은 뛰어났던 그였습니다.

 

그렇지만 장거정에게는 큰 결점이 있었습니다.

사치스럽고 여색을 좋아했으며, 그로인해 자신의 정적이 많음에도 뇌물을 받고 씀씀이가 컸다고 합니다.

또한 일조편법으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은 당연하게도 기득권의 권력을 줄이고 농민들을 대변했기 때문에 그의 실각을 노리는 정적들이 많아서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몸가짐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하니, 그는 언제든지 파멸할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장거정은 10여년간 재상으로 재직하면서 아버지가 사망해도 사직요청을 하지 않은채 북경에 남았습니다. 원래는 고향인 형주 강릉으로 돌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지만 잠깐동안 공백이 있을경우 실각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그대로 북경에 남아 만력제를 가르치고 정사를 돌본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건강을 해친 장거정은 1582년 과로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생전에는 국가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황제를 열심히 가르쳤으며 뛰어난 재상이었던 그는 사후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명예롭게 퇴장하는듯 했지만 종국에는 더욱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은 것입니다.

 

그렇게 장거정이 죽은후 그의 뇌물수수와 사치에 대한 탄핵이 올라왔고, 분노한 만력제는 철저한 조사를 명합니다.

비록 다른이들에게 뇌물을 받고 부패한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지만, 철저히 넉달간 이어진 조사에서 그의 재산은 약 10만냥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재상으로 받은 봉록과 받았다는 뇌물을 생각해도 너무 적은 액수였으며, 그의 아들들을 혹독하게 고문해 추가적인 30만냥의 재산이 있다는 실토를 받기는 했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더이상의 재산은 나오지 않았으니 생각보다는 그가 청렴하게 살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자들은 장거정의 이런 모습이 실망해 명군의 모습을 보이던 만력제가 암군으로 돌아섰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그를 엄격하게 통제하던 재상 장거정과 환관 풍보가 사라진 후 긴장이 풀어지고 본격적인 타락의 길로 들어선 만력제였기 때문에 그냥 그의 본모습이 나온것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후 명나라가 다시 쇠퇴하고 결국 망하게 된 것은 이렇게 막대하게 국고를 채운 장거정의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든 만력제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후에 벌어지는 임진왜란으로 황실내탕금을 탕진한뒤 다시 백성들을 쥐어짜며 민심을 떠나게 만들었고, 병을 핑계로 30년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니 장거정같은 뛰어난 재상이 더 있었어도 명나라가 망하는 것은 되돌리기 힘든 일이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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