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망 후 조선에 방치된 일본인들

2025. 8. 15. 11:05역사

반응형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1077278&tab=introduction&DA=LB2&q=%EC%A1%B0%EC%84%A0%EC%9D%84%20%EB%96%A0%EB%82%98%EB%A9%B0

 

조선을 떠나며 – Daum 검색

Daum 검색에서 조선을 떠나며에 대한 최신정보를 찾아보세요.

search.daum.net

 

 

1945년 8월 15일, 본토에 핵폭탄 두발을 얻어맞고 수많은 피해와 인명사고를 겪고난 일본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동안 신격화되며 대중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준적도 없는 일왕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에 전격적으로 항복해버렸고, 이것은 식민지 조선의 무조건적인 독립을 알리는 방송이기도 했습니다.

 

이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조선인들은 전부 모여들어 해방된 조국을 만끽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선인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며 무시했던 일본인들은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상태로 숨죽이며 살아야했고, 그때부터 일본인과 그에 협조한 앞잡이들을 향한 조선인들의 분노가 폭력의 형태로 발현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인들은 약삭빠르게 조선인 앞잡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도망치거나 숨어버렸고, 그래서인지 이런 폭력은 대부분 일본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같은 동포를 착취하는데 앞장선 이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패전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이들 이외에도 조선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향을 이곳으로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었으며, 조선인들과 철저히 격리된채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갑자기 모든것을 버리고 일본으로 가라는 것은 거의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들은 어떻게든 조선에 남아 살아가려는 생각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많은 일본인들은 재산을 빼돌려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며, 그래서 은행에 몰려들어 예금을 찾기위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돈이 빠져나가자 은행도 파산 직전까지 몰렸으며, 이렇게 일본인들이 갑자기 많은 현금을 가지게 되자 이것을 노린 조선인들이 강도처럼 빼앗아가도 경찰은 전혀 손을 쓸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무질서한 상황을 알수 있습니다. 

거기에 전쟁때에는 구경도 못해본 물자들이 시장에 헐값으로 처분되었으며 이렇게 빠르게 모든 재산을 처분하려는 일본인들 덕분에 일부 조선인 고물상들은 평소보다 못한 헐값으로 일본인들의 물건을 매입하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한편편 이렇게 일본인들이 벌어들인 재산은 조선에서 조선인들을 착취한 것이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미군정은 당시 일본인들이 가지고 갈수 있는 현금을 천엔 이하로 제한하고 들고갈수 있는 짐의 무게 또한 크게 제약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떻게든 조선을 빠져나가려 했던 일본인들은 점차 상황이 안정되고 미군정의 치안유지 덕분에 다시 조선에 눌러앉을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전에 팔아넘긴 세간들을 다시 사들였으며 어떻게든 조선에 있으려 했던건 이미 공습으로 파괴되어 아무것도 없는 일본으로 돌아가봤자 지금보다 나을게 없다는 생각이었던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일본인들은 오히려 조선말을 배워 눌러앉으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전혀 배운적 없던 조선어 강좌까지 열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지경까지 이르자 그동안 호의호식하던 일본인들은 호구지책으로 다른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소학교 교장이던 도코 요시마사는 공중목욕탕에서 일하며 물을 데우고 허드렛일을 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느낄수 없던 조선인들의 멸시와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학교 교사였던 여성은 학교가 망해 수입이 없어지자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야 했으니, 일본인들의 처지가 완전히 수직낙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일본 여성들은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술집이나 식당에서 일하거나 가정부로 들어가야 했으며, 일본 남성들은 생전 해보지도 않은 농사를 짓거나 사할린과 캄차카반도 일대로 고기잡이를 하러 가야했으니 조선에 남은 대가는 혹독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송환선에는 정원을 한참 넘긴 인원들이 탑승했고, 배가 부족하자 밀항선까지 등장해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노린 해적이 등장해 밀항선을 습격하여 재산을 빼앗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남한지역의 일본인들은 이렇게 힘들게라도 돌아갈수 있었지만, 소련이 진주한 38선 이북에 있던 일본인들은 더욱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들 일본인들을 우수한 노동력으로 인식하고 철저히 부려먹었으며, 북한 일대에 있던 산업기반시설을 운영하고 충당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은 전혀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을 무릅쓰고 본국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또다시 차별의 시선에 마주하게 됩니다.

우선 재산이 없으니 한곳에 모여 대규모로 수용소를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했는데, 너무 가진게 없는 상황에서 절도를 비롯한 범죄가 만연하고 각 식민지에서 옮겨온 풍토병 덕분에 병이 창궐해 죽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본토에 있던 일본인들은 이들이 식민지에서 사람들을 착취해 호의호식한게 지금의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며 배척했고, 천벌을 받고 있는거라면서 차별하는 이중고를 겪어야했습니다.

 

우선 참고문헌으로 인용한 책인 조선을 떠나며 에는 이렇듯 생생하게 담긴 일본인들의 패전후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식민지를 착취하고 차별하며 자신들만의 세상에 살던 이들이 일본의 패망으로 방치되었고, 그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조선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하층민으로 살기도 하고 힘들게 본국으로 건너가 질병과 차별이라는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34

 

‘해방 후 왜구 1만명 이상 남았을 것’ 증언 나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호사카 유지 교수, 해방 후 이 땅에 남은 ‘잔류 왜구’ 실체 밝혀쌀 곡창지대 김제평야, 공출항구 군산 일대 부자 일본인 1만명해방 후 빈털터리 본국 귀한 거부, 한국인으로 신분 세탁 잔류일

www.koreahiti.com

 

또한한 일본을 잘 아는 호사카 유지 교수의 강연에 의하면, 남한에 있던 일본인들 전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고 신분세탁과 이어진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인이었던 사실을 감추고 한국에 살아남은 일본인들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이들 재한일본인들이 결국 재산을 지키고 이후 권력까지 틀어쥐면서 한국인으로 살아온 사례를 들고 있으며, 이들이 일본 극우세력과 결탁해 한국의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니 청산되지 못한 일본인들이 아직까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