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3)
-
하나같이 개차반이었던 선조의 아들들
조선의 14대 군주인 선조는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조라는 묘호가 아까운 인물입니다. 물론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는 탁월한 감각과 결단으로 각지에 인재들을 배치하고, 서인과 동인의 싸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왕실과 자신의 권위를 높였으며 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등 나름 명군의 자질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을 통해 그의 단점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맙니다. 도성을 지키고 백성을 지키기는 커녕 정신못차리고 북쪽으로 도망치기 바빴고, 거기에 온갖 의심병이 돌아 의병장들을 죽이고 권한을 축소했으며 이순신을 비롯한 명장들을 파직하거나 자신의 말만 잘 따르는 원균같은 소인배들을 기용하여 힘들게 육성한 수군을 날려먹는등 전쟁기간에는 완전히 밑바닥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그래도 분조를 운영..
2024.04.03 -
임진왜란에 발생한 조선인 포로와 송환문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인들은 두가지의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도망간 조선 조정을 따라 피난하면서 조선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집과 고향을 점령한 왜군에게 항복하고 살 것인가의 선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많은 조선인들이 왜군에 항복하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특히 이후 발생한 정유재란부터는 조선인을 죽이고 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고가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더욱 일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게 됩니다. 대부분 일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줄어든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조선인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한 일본이지만, 막상 포로들은 기구한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조선인 포로들은 양민들만 납치된 것이 아니라, 양반을 비롯한 군인들과 학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항같은 학자들은 일본에 성리학을 ..
2023.08.25 -
황석산성 전투
황석산성전투 (naver.com) 황석산성전투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음력 8월) 경상남도 함양에서 벌어진 전투. 1597년(선조 30) 9월 24일(음력 8월 14일)부터 9월 28일(음력 8월 18일)까지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의 황석산성(黃石 terms.naver.com 황석산성 백성의 전투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황석산성 백성의 전투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www.hani.co.kr 치열했던 임진년의 전투 이후, 1597년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쳐들어 왔습니다. 임진년에는 웅치와 이치전투에서 패해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을 허물어버려 진주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이 뚫리고 맙니다. 하지만 명과 왜의..
2021.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