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후한의 운명을 가른 좌원전투

2025. 2. 15. 11:5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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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원고구려를 크게 일으킨 태조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대태왕은 폭정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중에 쫓겨나 죽은 차대태왕은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듯하고, 이런 정권교체의 과정에서 명림답부라는 명재상이 등장해 고구려를 구하게 됩니다.

 

명립답부는 서기 165년 폭정을 일삼는 차대태왕을 제거하고 아우인 신대태왕을 고구려의 군주로 만들었는데, 이때 나이가 99세였다고 합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인지, 신대태왕은 가장 높은 자리인 국상을 신설해 명립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며 고구려의 실권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구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후한이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신대태왕 4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우리군사 수백을 죽이자 복속되기를 빌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듬해인 5년에는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했다는 기록도 보이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

또한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하는 기록에서는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된 것은 이후 20년 후라는 점을 들어 시기가 맞지 않는 내용이라는 신채호 선생의 비판도 있는만큼, 이점에 있어서는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해봐야 할듯 합니다.

거기에 이렇게 현도군과 고구려가 가까웠으면 애초에 전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후 벌어지는 전투양상에서 고구려가 전혀 밀리지 않고 싸우는것을 보면 굳이 현도군에 평화를 애걸했다는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점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여튼 서기 172년인 신대태왕 8년, 한나라는 많은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한나라의 대병력이 모여 고구려를 공격하자 국상 명립답부는 많은 수의 적들을 영토 안으로 깊숙하게 끌어들인 뒤 보급을 끊고 지치게 한후 공격하는 청야전술을 건의했다고 합니다.

결국 계략에 넘어가 고구려 깊숙히 들어온 한나라군은 별다른 소득없이 굶주리고 추운 날씨에 고생했으며,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나라군이 철수하자 명립답부는 수천의 고구려 기병을 동원해 좌원에서 이들을 공격했으며, 결국 한나라군은 궤멸되고 말 한필도 살아돌아가지 못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좌원전투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후한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동원할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고구려를 친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 전투에서 한나라의 정예병들이 전멸하며 오히려 다른 민족들을 막을수 있는 힘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후한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에는 좌원전투가 전혀 기록되지 않았으며 오직 삼국사기만 이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나라의 패배를 감추고 오히려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후한의 황제는 삼국지연의 초반에 등장하는 영제인데, 파탄난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벼슬자리를 팔고 백성들을 쥐어짜는 모습은 아마 좌원전투의 패배 이후 고군분투하는 한나라 조정의 모습을 그린것이라고 봅니다.

정확한 한나라군의 규모는 기록에 없지만, 많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가 전멸했다는 내용을 보면 확실히 적은숫자는 아닌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많은 군사를 동원할 정도라면 지방정권의 차원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주도한 원정인듯 보입니다.

한나라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오직 우리 역사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현도태수나 요동태수가 독자적으로 일으킨 토벌전이라고 격하시키지만, 이후 벌어지는 후한 내부의 분열과 혼란으로 결국 농민반란이 일어나 황건적이 판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중앙정부가 이것을 제대로 토벌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때 정예병이 전멸해 한나라의 군사력이 약해졌다는 사실은 충분히 예측할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는 이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는 몰라도 또다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다시한번 서기 184년 수많은 군사를 동원해 또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좌원에서 고국천태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패배하고 베어진 후한군의 머리가 산처럼 쌓일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철저한 패배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 2차 좌원전투 이후로 후한은 완전히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황건적이 이끄는 농민반란군도 제압하지 못했으며, 각지의 군벌들이 독립하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300여년을 이어온 한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니 좌원전투는 고구려와 한나라의 운명을 가른 큰 사건이 분명합니다.

다만 중화패권적 시각에 입각해 이런 중요한 전투가 기록되지 않고 우리측의 짤막한 기록 몇줄만 전해질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좌원전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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