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않는 무령왕릉의 수수께끼

2024. 11. 17. 11:32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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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6BAYaJaHho?si=-YY4oxa--P4ptnji

 

백제의 동성왕은 약해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명군이었지만, 재위 후반부에 민심이 이탈하고 거듭되는 전쟁속에 측근의 반란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무령왕은 그렇게 강해진 백제를 바탕으로 다시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이것을 주위 국가에 선포할 정도의 중흥군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여러번 승리해 중국 남조 양나라 역시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인정했을 정도였으니, 당시 무령왕의 기세가 대단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무령왕은 523년 사망했는데, 잊혀졌던 그의 이름은 1971년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당시 공주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왕릉의 크기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였고, 다른곳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들의 규모가 더욱 크게 보일 정도로 백제를 중흥시킨 명군의 무덤치고는 소박한 크기였습니다.

 

이렇게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든 중흥군주의 무덤이 발견되긴 했지만, 이곳이 과연 무령왕의 무덤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점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주변에 백제왕궁터가 전혀 발굴되지 않는 점과, 다른 커다란 규모의 무덤들 사이에서 간신히 끼어있는듯한 소박한 규모의 무덤 등이 의문점으로 남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작은 규모와 어디 있는지 모를 위치 덕분에 그동안 도굴꾼들의 손을 피할수 있었고, 송산리 고분들을 전부 발굴해 털어간 일본인들의 손길 역시 피할수 있었습니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지석을 살펴보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선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은 아버지에게 무령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이것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무덤에서는 이상하게도 무령이라는 시호를 기록하지 않고 생전에 사용했던 이름으로 보이는 사마라고 기록한 점이 우선 이상한 점이 아닐수 없습니다.

20세기 초에 발견된 호태왕비를 살펴봐도 아들인 장수태왕은 아버지에게 존호를 올려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이라는 존칭으로 기록했음을 확인할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성왕은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은것인지 생전이름으로 묘지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시호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아버지를 매장한것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한 국가의 왕을 매장하는데 이렇게 서둘러야 할 일이 당시 성왕대에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성왕이 아닌 다른 시호를 올리지 못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령왕이 이곳에 묻힌것이 아닌가 추측할수도 있겠습니다.

 

거기에 함께 발견된 매지석을 보면 더욱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분명 공주일대가 백제의 수도인 웅진이었다면, 이곳이 전부 백제의 영토이니 굳이 토지를 사서 묘를 쓴것이 아닐텐데도 매지석에는 신지의 땅을 매입해 묘를 썼다는 이해할수 없는 내용이 있는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공주일대가 백제의 영역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는곳이었다면 백제 본국의 땅이 아닌 이곳에 굳이 돈을주고 땅을 매입해 왕릉을 조성했다는 것이니, 이런 매지권이 나온것도 어느정도 이해되긴 합니다.

이런 내용은 함께 위치한 송산리 고분들이 도굴되지 않고 어느정도 유물들이 남았다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텐데, 다른 고분들은 몽땅 털리고 비어있는 상황에서 무령왕릉만 이런 매지권이 있다는것 자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거기에 무령왕릉은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나온 의미있는 곳이었지만, 너무 졸속으로 발굴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미 경주 호우총을 발굴하면서 나름 경험과 실력을 쌓은 한국 고고학이었지만, 당시 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이 난입하면서 발굴팀을 제치고 무덤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등 난동을 부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 천천히 모든 것들을 보존하며 발굴해야 할 왕릉을 17시간만에 조사할 정도로 허술했으며, 유물이 도난당할 것을 우려한 발굴팀이 자루에 무자비하게 유물을 담아 반출할 정도로 고고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이렇게 발굴된 유물들은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순금팔찌를 신기해하며 접었다폈다를 반복했다는 기록까지 있으니, 그때까지 우리역사에 대한 인식은 처참했던 모양입니다.

 

확실히 무령왕릉은 수많은 유물들과 화려한 부장품들로 인해 강성했던 백제의 국력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하지만 왜 무령왕의 시호가 아닌 생전이름이 남았으며, 매지권을 작성하면서 굳이 땅을 매입해 백제땅이 아닌듯한 인상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의문점들이 풀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백제의 중흥군주인 무령왕의 좀더 자세한 일대기 역시 함께 밝혀지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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