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십자군 못지않게 추악했던 알비십자군

2024. 11. 15. 12:37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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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지역에서 일어났던 그리스도교의 한 일파인 보고밀파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카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취급되며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남프랑스 일대와 카탈루냐. 그리고 이탈리아 지역에까지 분포한 카타리파가 등장했습니다.

 

이 카타리파들은 남프랑스 일대에서 1112년 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오크어를 사용하는 랑그도크 지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카타리파는 금욕적이고 고결한 삶을 사는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당시 부패가 만연한 로마카톨릭에 대한 큰 반감을 가진 남프랑스 일대의 귀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결국 남프랑스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로마교황청을 긴장시켰습니다.

특히 카타리파는 수장인 비숍과 금욕생활을 하는 완덕자로 구분되는데, 이 완덕자들은 일체의 욕심을 버리고 채식과 생선을 먹으며 생활했고 거기에 이전까지는 여성의 역할을 부정하던 카톨릭과는 달리 여성들도 완덕자가 되어 사후세계에서 신의 천국에 갈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대학과도 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해 여성들도 평등한 교육을 받을수 있었으며 누구나 노력해서 완덕자가 되어 행복한 사후세계로 갈수 있다는 평등한 사상은 당시 교황과 프랑스왕을 긴장시키기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카타리파의 간단하고도 쉬운 교리 덕분에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귀족층과 카톨릭을 이해하기 어려운 서민층, 그리고 카톨릭에서 역할을 맡지못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교황청도 무시못할 큰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이런 상황속에 결국 교황청은 카톨릭의 권위를 부정하며 성경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교황과 카톨릭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교리를 내세우는 카타리파를 응징하기 위한 알비십자군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주도로 결성되었습니다. 특히 북부 프랑스의 기사들이 주축이 되었고, 이단을 응징하는것보다는 부유한 남프랑스에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도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당시 1204년에는 4차 십자군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대약탈을 벌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완전히 몰락시켰는데, 이로인해 십자군에 실망한 사람들과 또다른 약탈과 학살을 찾아 이동하는 이들이 또다시 부유한 남프랑스 일대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알비십자군이 공략한 베지에는 높은 성벽과 많은 수비병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평소 돈이 많기로 유명한 베지에였지만 시민들은 카타리파와 카톨릭으로 나뉘어 수비에 대한 생각이 달랐고, 결국 십자군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베지에가 함락되자 교황의 특사는 일일이 카타리파를 가려낼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주민들을 죽일것을 명령했고, 2만이 넘는 수비군과 주민들은 모두 십자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약탈한 막대한 보물들은 교황청과 대장인 시몽 드 몽포르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넘어갔으며, 차례차례 남프랑스 일대를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1209년 말에는 험준하기로 이름난 카르카손까지 함락되었고, 십자군이 함락한 도시들에서는 카타리파를 색출해 죽이는 잔인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움츠러든 카타리파는 툴루즈의 백작 레몽 7세의 지휘아래 툴루즈를 탈환하고, 시몽 드 몽포르까지 전사하며 십자군을 몰아내기에 이릅니다.

거기에 1226년에는 알비십자군을 후원하던 프랑스의 루이 8세까지 병사하며 완전히 상황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남프랑스 일대를 완전히 프랑스에 편입하려는 프랑스와 이단을 죽이겠다는 교황청의 집요한 노력으로 결국 툴루즈는 다시 함락되었으며 레몽 7세는 툴루즈를 프랑스에 바치며 항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카타리파는 완전히 패배하여 완덕자를 비롯한 카타리파 신도들은 전부 체포되어 화형당하거나 처형되었고, 마지막 남은 몽세귀르의 요새가 함락되면서 알비십자군은 결국 오랜 기간에 걸쳐 남프랑스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 카타리파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1321년 마지막 완덕자가 처형되고 1350년 이후에야 카톨릭의 영향 아래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십자군은 동방의 성지를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었지만, 점차 변질되어 같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헝가리의 자라를 공격해 약탈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탈 털어가는등 십자군의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남프랑스 일대의 카타리파를 응징하기 위한 알비십자군은 겉으로는 이단을 처단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속셈은 이 부유한 곳을 탐낸 프랑스왕 루이 8세의 욕심과 약탈을 통해 재산을 챙기려는 기사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카톨릭의 영향을 넓히려는 교황청의 탐욕이 맞아떨어져 같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약탈한 추악한 모습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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