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 정조의 한계

2024. 11. 24. 11:1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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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의 22대 군주인 정조를 개혁적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춘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하고, 왕권강화를 통해 당파싸움을 억제하는 등의 업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무 렵의 청나라와 일본에 비해 형편없는 국력과 한계로 인해 이후 펼쳐지는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하는 실책 또한 큰 인물이기도 합니다.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여러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내놓고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백성들의 조세부담이 경감되고 상업이 활발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로인해 후기조선이 좀더 발전하는 계기가 된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재위하던 청나라 건륭제와 비교하면 굉장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미 청나라 강희제 재위 후반에 일어난 혼란은 아들인 옹정제가 수습한뒤 잘 정비된 국가를 물려받은 건륭제는 청나라를 더욱 크게 키워냈으며, 서양국가들과의 교역을 통해 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국가로 만들어냈습니다.

 

거기에 이미 임진왜란 당시부터 국력이 역전되기 시작한 일본과도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황무지에 가까웠던 에도지방의 개발이 완료되고 이 지역의 생산력이 안정되면서 에도일대의 생산력만으로도 조선을 상대할수 있을 정도까지 격차가 벌어진 것입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납치한 도공들을 동원해 도자기를 만들었고,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국가들에 도자기를 수출하면서 역시 막대한 이윤을 남기며 청나라에 버금가는 아시아의 국가로 거듭난 것입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상업의 진흥을 이끌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지만, 이미 상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청나라와 일본에 비교할 정도는 되지 못했고 오히려 대외교역을 엄격하게 틀어쥐며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 점은 정조의 명백한 실책이라 할수 있습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 멸시하면서도 그들을 이길수 있는 국력은 기르지 않았고, 일본 역시 왜국이라며 낮춰부르면서도 임진왜란때 끌려간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송환하지 않은 것부터 시작된 조선의 기본적인 인식은 조선후기의 개혁적인 군주로 인식되는 정조마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에 정조는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크게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수원화성을 건축하면서 정약용이 서양기술로 만든 거중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더이상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신하들의 문체를 통제하고 성리학만을 강조하며 정치에 이용한 점은 분명한 그의 한계점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재정과 군사력까지 장악하며 절대왕정을 구축했지만, 이후 후계자 문제에서도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자신이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후계자를 잘 세워 조선을 잘 이끌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의 순조를 세자로 책봉하지도 않고 시간만 질질 끌다가 죽기 전에 책봉했으며, 재위 초 총애하던 홍국영에게 권력을 몰아주었다가 폐단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전 안동김씨인 김조순에게 또다시 권력을 집중하는 실책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분명 정조는 여러가지 실책에도 불구하고 업적을 많이 남긴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이 시기가 아닌  좀더 일찍 조선에 태어나 군주가 되었다면 더욱 많은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급변하던 세계정세를 등한시하며 그냥 성리학에 안주한 학자같은 군주였다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

거기에 동시기 청나라와 일본이 성장한 것에 비해 조선을 그만큼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울 뿐입니다. 대외교역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한 조선이었기 때문에 이후 이어지는 열강들의 침입으로 조선이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진 것에는 정조에게도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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