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광무제의 잔인한 모습들

2024. 10. 31. 12:4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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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외척인 왕망의 손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틈타 북방에서는 이민족들이 쳐들어오고 곳곳에서는 군벌들이 일어나 왕망은 20년도 버티지못하고 패망했고, 그 뒤를 이어 한나라의 방계황족이었던 유수가 집권하며 다시한번 한나라를 재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난 한나라는 수도를 서쪽의 장안에서 동쪽의 낙양으로 옮겼고, 그로인해 유수가 세운 한나라는 이전과 구분해 동한 혹은 후한이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한나라를 재건한 유수는 광무제로 등극해 국가를 경영했는데, 이 과정에서 후한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이전처럼 전부 죽이지 않고 권력을 빼앗은후 지방으로 내려보내 살게 했다는 이유로 큰 칭송을 받았습니다.

전한의 창업군주 유방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공신들을 거의다 주살했고, 이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역시 공신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결국 거의모든 개국공신을 제거했는데도 광무제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 살려준 것입니다.

이런 광무제를 따라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 역시 공신들을 죽이기보다 병권을 빼앗고 낙향시켰으며, 그로인해 공신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칭송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칭송의 뒤에는 광무제의 잔혹함이 숨어있습니다.

하남성 남양에서 처음 거병한 광무제는 왕망이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며 이름을 높였고, 이런 과정에서 계획적인 학살이나 의도적인 잔인함을 보이게 됩니다.

 

특히 하북일대의 군벌이던 왕랑과 싸울때 광무제는 여러번 급박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전투에 패배해 쫓겨가는 일도 있었고, 소득없이 무승부를 기록하는 경우도 있어서인지 예민해진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을 공격해 함락시킨 광무제는 성안에 있던 주민들을 전부 죽이고 한단성을 파괴하는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말았습니다.

원래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으며 하북일대의 가장 큰 곳이었던 한단은 굉장히 번영하고 큰 도시였는데, 이런 한단을 자신의 기분에 따라 파괴하고 주민을 도륙낸 광무제 역시 정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인해 대도시였던 한단은 완전히 쪼그라들었으며, 후한말기까지 재건되지 않아 이후에는 역사에서 사라져 다른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는등 쇠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무제의 가장 큰 실책은 실력있는 장수지만 잔혹한 성격을 가진 오한을 중용했다는 것입니다.

오한은 능력있는 장수여서 이후 광무제에 의해 큰 상을 받고 공신에 봉해진 인물인데, 전투를 할때마다 주변지역을 전부 약탈하고 주민을 죽이는 나쁜 버릇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런 패악이 심했는지 당시에도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광무제는 전혀 거리낌없이 그를 중용했으며, 이로인해 반란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오한이 광무제의 명령을 받고 하남일대를 평정하러 나섰는데, 이러는 과정에서 유수가 처음부터 거병했을때부터 지지하고 전폭적인 도움을 준 신야 일대까지 전부 함락시키고 약탈해 쑥대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광무제 휘하의 또다른 유능한 장수였던 파로장군 등봉의 고향이 신야였는데, 이곳에 있던 등씨 일가들도 전부 죽거나 약탈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눈이 뒤집힌 등봉은 반란을 일으켜 오한의 군대를 격파해버렸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등봉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광무제가 모든 군대를 이끌고 싸워 등봉을 죽이긴했지만 이것은 오한의 단점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탈과 학살을 방조한 광무제의 책임이라 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사천지방에 웅거한 공손술과 싸우는 과정에서 또다시 오한이 등장합니다.

원래 대장군이었던 잠팽이 암살된 후 오한이 모든 군사를 이끌게 되었는데, 사천일대에서 잔혹한 전투로 민심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결국 국력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공손술이 버티던 성도를 함락시켰습니다.

그러자 오한은 또다시 자신의 버릇을 참지 못하고 성도성 안에 있었던 공손술의 가족을 전부 죽였으며, 항복해온 장수들도 죽이는 한편 성도를 완전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해버렸습니다.

 

이때 얼마나 학살과 약탈이 극심했는지 사천일대의 민심은 완전히 후한왕조를 떠나버렸고, 몇년후에는 이런 일을 잊지 않은 익주인들의 봉기로 인해 반란까지 일어나며 또다시 이곳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다시 오한이 기용되어 반란을 진압했고, 그로인해 그나마 안정되기 시작한 성도일대는 다시한번 약탈과 방화, 대학살로 인해 초토화되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휘하장수는 물론 자신 역시 학살과 약탈에 큰 거리낌이 없어보였던 광무제 유수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최근에는 평가가 바뀌고 있는 중입니다.

예전에는 후한서의 기록대로 공신을 죽이지 않고 백성을 사랑한 어진 군주였다는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냉혹한 모습과 부하장수들의 학살과 약탈을 말리지 않고 방치하는듯한 태도 덕분에 그의 잔인한 모습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끌어내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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