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정권과 인조의 무능함이 촉발한 이괄의 난

2024. 8. 9. 10:59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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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임진왜란의 비참한 상황을 어느정도 극복했다는 평가도 있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강성하면서 서북쪽의 군사를 강화해야 했고, 명나라가 원병을 요청해 함께 싸운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동안 힘들게 키워낸 정예병들도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집권하던 북인정권은 광해군을 부추겨 많은 왕족들을 살해하고 공안정국을 만들었으며, 급기야는 선조의 비였던 인목대비까지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함으로써 서인과 능양군에게 공격받을 약점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광해군은 백성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궁궐을 짓고 일부 총애하는 신하와 궁인이 권력을 남발하는것을 막지 않았고, 결국 인조가 되는 능양군과 서인의 우두머리가 결국 광해군을 내쫓고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능양군과 서인정권이 내세운 반정의 큰 이유는 바로 우리를 구해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고 후금과 내통하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오히려 천계제가 조선의 광해군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능양군과 서인들을 의심할 정도였으며, 조선 사신은 명나라 지방관리들에게 푸대접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엄청난 뇌물을 풀어 이들을 회유해야 했으며, 결국 즉위한지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명나라로부터 인정받을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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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하여 후금에 항복하긴 했지만, 후금에서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해군이 이후에도 온갖 원성을 들어가면서 서북지역의 방어상황을 돌보고 군대를 확충하는 등 노력을 해왔는데, 친명배금과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낸 서인정권은 오히려 이 일대의 상황을 방치할 뿐이었습니다.

거기에 반정공신으로 큰 벼슬을 기대했던 이괄은 오히려 서북지역으로 쫓겨나 변방수비를 하고 있었는데, 서인정권과 인조가 자신을 숙청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자 결국 서북일대의 정예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이었지만 조선에 투항해 조선군으로 활동하던 항왜병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서북일대에 배치되었는데, 이괄은 이들까지 모두 이끌고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또한 이괄과 함께 반란혐의로 잡혀 압송되던 한명련까지 구출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했습니다. 도원수 장만은 정충신과 함께 방어에 나섰지만 정찰실패로 이괄군을 포착하지 못했고, 큰 싸움을 피한채 도성으로 향하는 이괄을 막지 못한채 추격할 뿐이었습니다.

 

거기에 큰 전투없이 진행되던 이괄의 진군을 황주에서 막아섰지만 역시 패배하고 말았고, 특히 예성강 인근의 마탄에서는 관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장수 일곱명이 전사해 목이 베어질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이괄군의 기세가 대단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결국 임진강의 방어선도 뚫리면서 한양이 위태로워졌고, 당시 이괄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씌워 감옥에 가두었던 북인들을 전부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후에 인조와 서인정권은 남쪽 공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괄의 반란군은 한양을 점령하면서 민심을 모으긴 했지만, 곳곳에서 올라온 근왕군들에 포위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령에서 관군과 크게 접전을 벌였고, 한동안 이괄의 군대가 압도적인 전력을 보이며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과 함께 관군이 쏘아대는 화포에 의해 이해할수 없는 패배를 당하고 결국 한양에서 철수해 도망치게 됩니다.

 

경기도 광주까지 도망친 이괄은 부하장수들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았으며, 그와 함께 반란에 동조한 한명련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거기에 살아남은 항왜들은 경상도 방면으로 달아났지만 같은 항왜출신인 김충선의 토벌에 전부 살해되며 이괄의 난은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그렇게 반란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났습니다.

광해군이 그렇게 힘들게 재건한 서북일대의 정예병과 기병들, 그리고 유능한 장수들은 전부 이때 죽거나 처형되었고 그로인해 서북방 일대의 방어는 완전히 뻥 뚫린채 방치되었습니다.

특히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은 후금으로 도망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후금조정에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고 부추겼고, 이후 후금이 조선을 침공할때 길잡이와 조선군의 허점을 공개해 전쟁에서 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큰 허점이 생겼지만 이후에도 인조와 서인정권은 무조건적인 친명배금을 내세우며 후금을 배척하기 바빴습니다. 물론 이런 정책을 추진하면서 서북일대의 군사력을 재건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지만 군사를 더 키우면 이괄처럼 반란을 일으킨다며 견제에 급급했고, 파견된 장수들이 군사훈련도 제대로 못하게 막았다는 기록을 보면 인조와 서인들은 정말 아무 대책없이 시간만 보내며 입으로만 친명배금을 떠들어낸 무능력한 작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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