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치명적인 상처가 된 민씨척족의 만행들

2022. 3. 10. 17:3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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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고종이 등극한 이후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사를 맡아 처리한지 10년이 지나자, 그동안 세도정치와 조세수취의 문란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부담이 한층 적어졌습니다.

양반도 군포를 부담하고, 백성과 지방민들을 괴롭히는 서원을 철폐하는 등의 개혁정책으로 조선을 많이 바꿔놓은 대원군이었지만 뜬금없이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면서 대규모로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고 나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양반들와 부호들에게 기부금을 받아내고, 왕실의 내탕금까지 경복궁 중건비용으로 사용했지만 워낙 크게 중건을 시작한 덕분에 자금이 부족해졌고 결국 당백전이라는 상평통보보다 훨씬 비싼 가치를 지닌 돈을 찍어내어 인플레이션을 야기했으며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고갈시키게 됩니다.

 

어차피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어지고, 망국으로 연결되면서 경복궁은 광무황제가 정궁으로 활용하지 않고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나중에 조선왕이 대한의 황제가 되면서 주로 경운궁을 이용하게 되면서 크게 가치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망국 이후에는 경복궁의 대부분이 헐리고 건물이 옮겨다니면서, 조선의 궁궐이라는 의미까지 크게 퇴색되고 마니 대원군이 그렇게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지은 속뜻이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https://youtu.be/vCxeOp57bcE

그리고나서 대원군이 섭정한지 10년이 지났을때, 최익현의 상소로 시작된 고종의 친정 여론에 밀려 결국 대원군이 일선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를 왕이 직접 메우기보다는 당시 왕후였던 민씨가 배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나마 대원군이 섭정하던 시절에는 노론의 일당독재를 막기위해 남인과 북인들을 많이 등용했는데, 민씨들이 세도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다시 노론 일당체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거기에 왕후 민씨의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모두 관직을 차지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재산으로 착복하는 일이 벌어지니 결국 조선이 망조가 드는것은 민씨척족의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대원군이 10년간 쌓은 부를 한순간에 탕진한 나쁜여자라며 왕후 민씨를 비난하고 있지만, 이미 대원군이 쌓은 국부는 경복궁 중건에 대부분 들어갔고, 그 이후의 국가예산을 탕진한 것은 민씨 척족들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특히 개방정책을 실시한 이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대우는 무척 좋은 편이었지만 그에 반해 구식군대의 병사들은 급료가 밀리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당시 세자의 혼인에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더욱 구식군대에 급료를 지불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한동안 밀렸던 급료로 병사들에게 쌀이 지급되었지만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가 쌀을 빼돌리고 대부분 썩은 쌀과 모래, 겨를 섞어 지급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결국 폭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임오군란이 터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씨들이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군란에 합세한 한성 주민들은 민씨들의 악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정권의 실세로 온갖 치부를 행한 민겸호는 군졸들에게 맞아죽었으며 결국 왕후를 죽이겠다는 군졸들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서둘러 왕후는 경기도 이천의 장호원으로 도망칠수밖에 없었습니다.

 

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28052 

 

조선, 부패로 망하다 (48) - 민씨 정권의 세 도둑 - 시민의소리

189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울에 화적떼가 크게 일어나, 대궐로 진상되는 임금의 물건까지 도난당하는 일까지 생겼다.이러자 고종은 좌우 포도대장 한규설과 이종건을 파직시키고, 신정희를

www.siminsori.com

민겸호는 민씨척족의 실세로 온갖 악행을 저질러 병사들에게 죽었지만 다른 민씨들의 악행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민영주는 한강으로 올라오는 상인들의 물건을 빼앗고 형벌을 가해 치부하는데 악명이 높았고, 민두호는 욕심이 많고 천박하여 춘천유수로 재직할때 강원도의 백성을 수탈하는데 열중하여 강원도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형식은 가장 크게 국가재정을 빼돌린 인물로써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되자 삼도의 부자들을 잡아 가두고 돈을 바치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는 방법으로 당시 국가세입 480만냥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70만냥을 치부하여 아주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집니다.

거기에 민씨집안의 거두 민영휘는 나중에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에서 하사한 관직을 받아 부를 축적했고, 부동산에 대대적으로 투자하여 거부가 되면서 민씨집안의 대표 민족반역자가 되어버립니다.

 

이미 순조연간부터 시작된 세도정치로 인해 세계사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실패한 조선인데, 개화정책을 실시하여 부지런히 앞선 기술과 제도를 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중요한 순간에 집권한 민씨들이 이렇게 조선에 큰 타격을 입혔으니 민씨집안은 할말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 집안사람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여 중용한 고종과 왕후 민씨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며, 갑신정변 이후로 개화정책을 거의 폐지하다시피한 수구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민씨집안 역시 동등한 수준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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