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의 전성기를 연 셀림 1세

2025. 3. 16. 13:3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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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이 1453년 동로마를 정복한후,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위대한 정복자였던 메흐메트 2세는 그 아들인 바예지트 2세에게 술탄자리를 빼앗기고 독살당했는데, 바예지트 2세마저 아들에게 술탄자리를 빼앗기고 쓸쓸히 죽어가는 최후를 맞았습니다.

 

바예지트 2세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흐메트가 유력한 차기술탄 후보였습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의 유능함을 증명했고, 초조해진 셀림은 아버지를 군대를 동원해 공격했지만 제국의 정규군에게 패하고 도망치게 되었지만 아흐메트가 귀족들과 예니체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오히려 1512년 다시 이스탄불을 공격해 점령하고 술탄자리도 찬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듬해 아흐메트마저 물리치고 그를 사로잡아 처형했으며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자신들의 형제를 전부 죽여버렸으며 아버지인 바예지트 2세까지 독살하며 완전한 오스만제국의 술탄으로 자리한 것입니다.

 

 

이후 셀림 1세는 동쪽의 페르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이란지역의 혼란을 수습하고 사파비 왕조를 세운 이스마일 1세는 어린시절부터 군사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사파비 왕조를 건국해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에 셀림 1세가 도전장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셀림 1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페르시아군을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격파하며 사파비왕조의 수도인 티브리즈까지 점령하고 약탈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셀림 1세는 사파비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싶었지만 이미 깊숙히 페르시아 안으로 들어온 터라 이정도까지만 무력시위를 한 뒤 군대를 보존해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사파비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이 패배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결국 술에 빠져 살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으니, 한동안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에 대항하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후에는 이집트와 중동 일대의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맘루크 왕조와 싸우게 됩니다.

맘루크는 래반트 지역까지 쳐들어온 몽골군을 거의 전멸시켰을만큼 강한 전투력을 가진 국가였는데, 셀림은 맘루크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을 완전히 오스만의 영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아바스 왕조의 후손이 가지고 있던 칼리파의 칭호까지 양도받아 셀림 1세는 진정한 이슬람의 수호자이자 왕중왕으로 거듭났으며, 그로인해 오스만제국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셀림 1세는 재위한지 8년만인 1520년 로도스섬 원정을 준비하다가 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49세라는 많지 않는 나이였기 때문에 오스만제국의 입장에서는 무척 안타까운 술탄의 사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뒤를 이은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제국을 완전한 전성기로 올려놓은 명군이었기 때문에 셀림 1세는 자식농사마저도 잘 마무리지은 군주였던 것입니다.

 

겨우 8년이라는 짧은시간동안 재위한 셀림 1세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버지 바예지트 2세는 원정을 극도로 꺼려 한창 뻗어나가던 오스만제국이 다시금 쇠퇴하는 원인을 만들었는데, 그의 아들인 셀림 1세는 곳곳에서 자신의 능력를 보여주는 전쟁으로 인해 그 짧은시간동안 제국의 영토를 두배 넘게 확장해냈습니다. 예전 비슷한 영토를 차지했던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외부세력 덕분에 원정군을 보내고도 그처럼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것과 비교해보면 셀림 1세의 능력이 어땠는지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아마 셀림 1세가 좀더 오래 재위했다면 쉴레이만 1세가 함락시키지 못했던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차지했을지도 모르며, 그로인해 오스만이 유럽지역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를일이니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참 아쉬운 술탄의 죽음일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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