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5. 11:42ㆍ역사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 10월, 조선 조정에는 반가운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진주성을 수비하고 있던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 3만의 치열한 포위를 이겨내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수성전의 주인공인 김시민 장군은 고려시대의 명장인 김방경의 후손이고, 이후 그의 후손인 백범 김구는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대항해 싸웠으니 이 집안은 정말 명문가라고 불러도 부족할듯한 느낌입니다.
1592년 여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포와 동래성은 곧바로 무너졌고, 곳곳에서 조선군은 왜군에 패하며 달아났습니다. 당시 진주목사이던 이경 역시 김시민을 비롯한 장수들과 함께 진주성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도망쳤지만, 경상도 초유사였던 김성일이 다시 이들을 불러와 진주의 수비를 맡겼습니다.
그런던 와중 이경이 병으로 죽자, 김시민이 그 뒤를 이어 진주목사가 되었습니다.
김시민은 단순히 진주성을 지키는데 몰두한 것은 아니고 주변 왜군을 격파하고 적장을 사로잡아 조정에 압송하는 등 여러 전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주변의 구원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출병해 다리에 부상을 입기도 하는등 김시민은 적극적으로 왜군을 공격해 진주를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자신의 근거지를 비우는 일이 많은 그를 보며 초유사 김성일은 김시민의 활동적인 모습을 경계하기도 했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1592년 10월에 왜군은 전라도쪽으로 진공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해왔습니다.
총병력 3800명 정도의 조선군은 3만이 넘는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치열하게 싸웠고, 주변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진주성 안의 백성들도 모두 협심하여 거센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마침 진주성을 돕기위해 도착한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를 공격해 성을 공격하는데 주의를 분산시켜 성을 지키는데 어느정도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왜군이 철수하기 전 마지막 공격은 정말 거세게 진행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때 조선군을 지휘하던 김시민은 머리에 총을 맞고 말았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곤양군수 이광악이 조선군을 지휘해 끝까지 성을 지켜냈지만, 결국 김시민은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진주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비통하게 울었으며 그의 시신이 고향으로 향하자 모든 백성들이 수레를 끌고 가겠다고 자원할 정도로 모두가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시민 장군은 영웅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이후 진주성은 왜군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특히 3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성을 빼앗지 못했고 오히려 병력 대부분이 전투 불능에 빠지며 망신만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왜군은 다시 10만이 넘는 병력과 기라성같은 장수들로 진주성을 공격해왔고, 이번에는 진주성이 함락되며 3만이 넘는 조선군과 양민들이 살육당하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측에서는 진주목사이던 서예원의 목을 베어 김시민을 죽였다며 통쾌해했지만 이전에 얼마나 큰 패배를 당했는지 일본에는 김시민의 아들이 두꺼비를 타고 나타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일본의 무사들과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그의 이름은 사후에도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김시민은 뛰어난 능력으로 왜군에 타격을 주었으며, 진주성도 잘 지켜내 왜군에 큰 피해를 줌과 동시에 사방에서 살기위해 몰려든 조선인들도 지켜내는 큰 전공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적극적인 성격 덕분에 오히려 총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으니, 이후 이어진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생각했을때는 그가 어떻게든 몸을 아껴 황진과 함께 진주성을 지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어 수많은 양민들과 조선군이 떼죽음을 당했고, 진주 일대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대량으로 일본에 팔려가 이리저리 노예로 흩어졌으니 김시민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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