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인재였던 이리역 폭발사고

2023. 4. 9. 10:20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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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7년 11월 12일 오후 9시, 이리역으로 화물열차가 들어옵니다.

한국화약에서 생산한 40여톤의 다이너마이트를 기차에 싣고 광주역으로 가던 와중에,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다이너마이트와 초산 암모니아, 뇌관 등이 구분되지 않고 한꺼번에 운송되는 바람에 더욱 큰 피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원래 이런 화약을 운송할때는 안전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호송해야 하지만, 당시에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무자격자였던 신씨가 차출되어 기차에 탑승했고 그것이 결국 이런 엄청난 사고로 이어진 것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기차가 역을 지날때 뇌물을 주어야 빠른 통과가 가능했는데, 당시 철도요원들이 뇌물을 받지 못했다면서 폭발물은 빨리 통과시켜주는게 원칙이지만 하루동안 통과를 시켜주지 않고 이리역에 멈춰세운 것입니다.

결국 통과되지 못하는 과정에서 호송원이 답답하다며 밖에 나가 음주를 하였고, 다시 기차로 돌아와 촛불을 켜고 침낭을 덮은채로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화약이 있는 가운데 불을 켜는것은 자살행위와도 다름없는 위험한 행동인데, 역시 무자격자였던 신씨의 무지가 이런 참사의 도화선을 당긴 것입니다.

 

잠을 자던 와중에 초가 넘어져 화물에 불이 붙었고, 당황한 신씨가 침낭으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결국 불이 더욱 크게 번졌으며 뇌물을 받지 못했다며 열차를 붙들어둔 철도요원들도 불이 커진것을 보고 주위에 위험을 알리고 대피시키기는 커녕 자신들의 몸만 빼내어 도망쳐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불이 커지자 역무원들이 화재진압을 시도했지만, 결국 불이 커지면서 화약이 폭발하여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결국 열차에 실려있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들이 전부 폭발하면서 이리역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주변 반경 500미터 안에 있던 모든 건물들도 함께 폭발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리역 주변에 있던 판자촌들도 폭발에 휘말려 전부 날아가버렸다고 합니다. 워낙 부실하게 지은 판자촌이라 더욱 피해가 컸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일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렇게 어이없이 일어난 대규모의 폭발 덕분에 5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1158명이 다쳤고, 7800명의 이재민들이 발생하는 초대형 폭발사고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이리역 내에 석유를 가득 싣고 도착한 기차가 있었는데, 다행히도 폭발소리를 들은 기관사가 열차를 무사히 대피시켰고 이리역으로 들어오기로 했던 기차가 작은 실수로 연착되는 과정에서 이리역으로 들어오지 못해 더이상의 피해가 늘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석유가 함께 폭발했거나 다른 열차가 사람들을 싣고 이리역에 들어왔을때 이런 폭발이 일어났다면 더욱 큰 피해가 생겼을텐데, 다행히도 더이상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는것이 다행일 뿐입니다.

 

결국 이후 당시 뇌물을 요구한 철도요원 두명은 검거되어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호송하던 신씨는 징역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지만 당시 함께 기소된 한국화약 간부들은 전부 무혐의처리 되었습니다.

그때 비용을 아낀다면서 무자격자에게 철도호송을 맡긴 한국화약 간부들은 전혀 처벌받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못했다면서 이리역에 기차를 통과시켜주지 않고 잡아둔 철도요원들도 역시 솜방망이같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열차를 호송했던 신씨만 10년의 징역을 선고받았으며, 이리역 주변에 살던 판자촌 주민들은 순식간에 살던곳을 잃어버리는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거기에 신씨 역시 형기를 전부 채우지 않고 도중에 풀려났다고 하니, 진정한 이리역 폭발사고의 피해자들은 당시 집이 전부 날아가 갈곳도 없이 흩어져버린 판자촌 주민들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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