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동성왕의 업적과 의문의 죽음

2022. 4. 9. 12:29역사

반응형

https://youtu.be/LlMj8jP8uAw

서기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됩니다.

그러면서 수도에 남아있던 개로왕과 왕족들은 전부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태자인 문주가 남쪽으로 도망쳐 웅진으로 천도한후 왕이 됩니다. 하지만 쫓겨내려온 군주라서 그런지 왕권이 약했고, 즉위한지 몇년 되지 않아 신하에게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서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합니다. 나이는 어린 편이지만 국정운영의 감각이 있었던 왕이라서 기대를 해볼법했는데 15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게 되어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이것 또한 예상보다 출중했던 삼근왕의 능력에 놀란 귀족들이 암살로 처리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좀더 어린 나이의 동성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마 백제 귀족들이 좀더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는 왕을 찾아 즉위시킨것으로 보이는데, 모두의 예상의 깨고 동성왕은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우선 그동안 고구려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백제군을 정비하여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냈습니다.

남하하던 고구려군을 막아내고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올렸으며 말갈의 지속적인 침입도 잘 방어해내는 성과를 올린 것입니다. 또한 신라와의 동맹을 견고하게 다졌으며 더이상 고구려가 남진하지 못하게 막아내는 큰 업적을 올린것입니다.

 

하지만 동성왕의 큰 업적은 북위와의 전쟁입니다.

당시 남북조로 갈려 싸우고 있던 중국인데, 북조인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주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백제와 충돌한 것입니다. 

중국 남조인 양나라에서 각국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그리고, 간단한 설명까지 적어놓은 양직공도를 보면 백제를 래이, 마한의 한 종족이며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점유할때 백제는 요서에 진평현을 두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남제서를 보면 488년 북위가 백제를 기병으로 공격했지만 잘 방어하고 오히려 역공하여 북위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내용까지 나오니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사실로 보입니다.

거기에 백제가 전쟁에 이기고나서 공을 세운 장수들을 대륙 곳곳에 태수로 임명하는 것을 보면 이전의 쪼그라든 백제에서 좀더 국력을 회복한 모습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분명 중국의 정사라는 역사서에 엄연히 남아있는 사실인데도 우리나라 국사교과서나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와 북위가 육지에서 기병으로 싸웠다는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듯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북위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싸웠다는 주장도 있긴 했지만 분명히 기병으로 백제를 쳤다는 기록은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런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충분히 연구해볼만한 사항이라고 봅니다. 또한 장수왕의 침입으로 도성을 잃고 쇠퇴하던 백제를 어린나이에 즉위해 다시 강국으로 끌어올린 동성왕의 큰 업적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백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고 국력을 크게 키워 동성왕 다음에 즉위한 무령왕대에는 고구려를 제압하고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었으니 동성왕의 업적이 결코 작지 않다고 볼수 있습니다.

다만 동성왕이 이렇게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웠지만 재위 후반부에는 정사를 게을리한듯 보입니다. 도성 옆에 임류각이라는 건물을 짓고 진귀한 동물을 키우는데 열중했다는 기록을 보면 스트레스를 그런 방식으로 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재위기간 내내 왕권을 위협하는 귀족들과 싸웠고, 재위 후반부에서는 측근의 말만 들었다는 기록을 보면 귀족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왕권을 좀더 키우는데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에 대한 동성왕의 부정적인 기록이 남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결국 그런 왕권강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동성왕은 좌평 백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채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나중에 발굴된 묘지석같은 유물을 통해 앞서 즉위한 삼근왕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는 바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여 죽음을 맞았으니 동성왕 시해사건은 결국 귀족들의 계략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동성왕이 20년 넘는 즉위기간동안 아들이 없었을리 없고, 큰 업적을 남겼으니 아들이 승계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굳이 나이 많은 무령왕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보면 귀족들의 합의가 된 상황에서 동성왕이 살해당했다는 정황이 되겠네요.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적혀있지만 다른 기록들과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동성왕이 죽은뒤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것을 보면 무령왕과 귀족들에 의해 숙청당했을 확률이 높아보입니다.

 

이런 정치적 정변을 통해 즉위한 많은 사례들을 보면 이후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결국 망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도 무령왕은 능력있는 군주여서 고구려의 수곡성을 함락시키는등 다시한번 백제를 중흥시키는 업적을 세웁니다.

다만 동성왕에 대한 업적의 재평가와 같은 별다른 사후조치가 없는것을 봐서, 석연치않은 무령왕의 즉위과정에 의문을 가질수밖에 없긴 합니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부터 삼근왕, 그리고 동성왕까지 암살로 마무리된 왕들과는 달리 나라를 잘 다스리고 중흥의 업적을 남긴 무령왕이지만, 그 아들인 성왕은 신라군의 손에 죽게되고 결국 100년 후에는 나라를 잃게되니 차라리 동성왕이 오래 살아서 그의 아들이 승계한 백제의 역사로 이어지지 않은게 안타깝네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