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으로 살펴보는 청나라와 조선, 그리고 일본

2022. 3. 14. 16:27역사

반응형

https://youtu.be/dsJFlL4BN8A

청나라를 반석으로 올려놓은 강희제와 옹정제의 치세 후에 등극한 건륭제는 강건성세라는 미명으로 그의 통치기간을 미화하며 십전무공이라는 허황된 이름으로 되지도 않은 포장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결국 옹정제가 10여년간 재위하며 쌓아올린 청나라의 국부는 건륭제가 모두 소진하게 되며, 그 이후로 이어진 가경제와 도광제 치세에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함께 사회기강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과 교역하던 광동성의 광주에서 청나라의 비싼 비단이나 도자기, 차 등이 수출되었지만 청으로서는 별로 수입하는 제품이 없었기 때문에 무역의 불균형이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면직물이 값싸게 공급되고 있었지만 이미 청나라는 명청 교체기에 대규모로 발생한 노예와 갑자기 폭증한 인구를 이용한 소규모 공업으로 면직물의 단가를 맞출수 있었고, 오히려 영국으로부터 대규모의 은을 들여와 전 세계적으로 은의 가치가 폭등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이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고 상황은 역전되어 청나라 국내의 은이 모두 빠져나가고 아편의 밀수가 크게 성행하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 고위관료들도 아편을 즐겨 사용했고, 황제였던 도광제 역시 아편에 중독되었다가 간신히 벗어날 정도였다고 하니 아편이 얼마나 청나라를 갉아먹었는지 알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아편이 만연하고 있으니 결국 청나라 정부가 아편을 강하게 단속하고 나섰지만 이미 너무 폭넓게 퍼져버린 아편을 단속할수 없었고, 결국 아편무역의 중심인 광동으로 흠차대신 임칙서를 보내 단속을 강하게 시행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의 양이 막대했는데, 임칙서는 이들을 억류하고 아편을 몰수해 전부 바다에 태워 던져버리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편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던 영국은 이것을 빌미로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1840년 5월 결국 전쟁을 결의한 영국함대가 접근하면서 임칙서가 지키고 있는 광주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함대가 북상하며 바닷가와 장강 일대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결국 북경의 코앞인 천진까지 영국함대가 들이닥치며 남경이 함락직전까지 진행되자 어쩔수 없이 남경조약을 통해 임칙서가 폐기한 아편을 배상했으며 홍콩을 할양하고 다른 다섯곳의 항구를 개항하는 등 굴욕적인 타협을 하고 맙니다.

 

이 전쟁을 통해 당시 청나라가 자랑하던 팔기군의 무력화된 모습이 드러났고, 팔기군을 대신해 주력으로 운영되던 한족부대 녹영병 또한 부패하고 약해진 모습이 탄로나게 됩니다.

또한 영국함대에 맞서 싸우지도 못하는 청나라의 관병들을 보면서 강남쪽의 한족들에게 더욱 청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고, 이것은 1851년 홍수전이 기독교적인 이상세계를 건설하겠다면서 일으킨 태평천국운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태평천국을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그로인해 1차 아편전쟁때보다 더욱 굴욕적인 내용으로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도 더욱 크게 물어야 했으며, 추가적인 항구도 개항하는등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됩니다.

거기에 북경을 지키지 못하고 열하의 별장으로 피신한 함풍제가 얼마 후에 죽어버리게 되니, 가뜩이나 어려운 청나라가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청나라가 열강들에 의해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때 조선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청나라를 거쳐 이런 소식들이 전해진 탓도 있었지만 너무 조선에서 세계 정세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던게 아쉽네요.

그동안 청을 거쳐 열강들과 제한적으로 접촉해온 조선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천자국을 자신하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한 청나라도 그렇게 털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도정치로 극심한 정체기를 겪고있던 조선으로서는 아편전쟁에 더욱 신경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은 당시 접촉하던 네덜란드를 통해 비교적 정확한 상황을 알수 있었고, 결국 미국이 군함을 앞세워 압박하자 나라의 문호를 열고 개항하여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청일전쟁을 통해 청을 무찔러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받을수 있었고, 조선을 점령하여 곳곳에 있는 금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릴수 있었습니다.

 

결국 청과 조선이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지만 그나마 일본은 빠른 개방과 개혁으로 이런 상황을 바꿔냈으니, 더 빨리 준비하지 못한 우리 조상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