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를 뿌리뽑은 옹정제
청나라의 강희제는 보기드문 명군으로 국가를 위험에서 구해낸 뛰어난 인물은 맞지만, 너무 오래 재위하면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재위기간이 길어지고 강희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신하들을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고, 특히 후계자인 태자 윤잉이 공공연히 태자자리에 너무 오래있었다는 말을 늘어놓는등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며 부정부패가 심해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옹정제는 우선 당시 청나라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싸웠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도 부정부패가 심각했는데, 청나라가 성립되면서 기존의 명나라 정부기관과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흡수하다보니 만주족만의 습성을 잃어버리고 한족들의 좋지 않은 점까지 받아들이면서 강희제 말기에는 겉잡을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일조편법이 등장해 지세와 노역, 잡세등을 전부 은으로 통합해 토지를 가진 이들에게 부과하며 명나라가 그나마 숨을 쉴수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 역시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해 일조편법을 시행했는데, 토지를 가진 지방의 토호들이 지방관들과 결탁해 세금을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도망쳐 떠돌게 되고, 결국 이렇게 모여든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세금문제에 손을 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선 강희제 시절에 어느정도 청나라가 안정되고 통치에 자신감이 붙자, 강희제는 앞으로 영원히 세금을 늘리지 않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숨겨진 인구를 찾아내고 어느정도 세금도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옹정제 즉위 초부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이것을 일조편법이라는 수취제도의 개선으로 시도하게 됩니다.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세금문제를 피하자 아예 토지와 결합한 세금으로 개편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주들과 부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제는 철저한 일조편법의 시행으로 지방관들과 지주들과의 연결을 차단했고, 그로인해 곳곳에서 지세의 납부를 거부하며 국가에 반항하던 지주들은 조사를 거쳐 세금을 납부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을 위한 정책도 내놓았습니다.
명나라가 성립되면서 주원장은 평소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증오했기 때문에 녹봉 역시 최저수준으로 책정했는데, 이것이 명나라때의 심한 부정부패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때의 일반적인 농민이 1년동안 은 20냥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청대의 1품 관리가 은 180냥을 받았을 정도이니 당시 관리들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낮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은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뇌물을 받았고, 이것이 바로 부정부패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은 모선 혹은 화모라는 별도의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다른 수입원이자 공적인 판공비로 활용해왔는데, 이것이 점점 폐단이 생겨 지방관들은 잡다한 이유를 붙여 모선을 점점 늘려 백성들을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옹정제는 모선귀공 제도를 법으로 못박아 시행했으며, 그로인해 모선을 정해진 수준 이상으로 거두지 못하게 함은 물론 관리들의 녹봉도 현실화하면서 부정부패를 막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옹정제는 관리들이나 황족들의 비리가 밝혀지면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재산을 몰수하는 엄격함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몰수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얻었지만 단순히 재산만 몰수하는것이 아니라 숨겨둔 재산을 꼼꼼하게 찾아내 전부 국고로 귀속했으며, 옹정제의 이복형제들도 이런 부정부패에 휘말려 재산을 전부 몰수당하고 가산을 팔아 변상해야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이전에는 국고를 횡령해도 그 액수만큼 채워놓으면 처벌하지 않았지만 옹정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국고를 다시 채워놓아도 바로 파직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남과 호남에서 상당수의 관리들이 부패가 드러나 파직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강직한 모습을 보인 이위와 전문경을 중용해 비리를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또한 비리에 연루된 관리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친지들의 재산까지 빼앗는 치밀함을 보여줬습니다. 부패로 재산을 불린 관리들은 주변에 이런 재산을 나누어 은닉하거나 주변인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점까지 옹정제가 파악해 전부 몰수했고 관리가 혹여 자살해서 재산과 가족을 지키려해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몰수해야 할 이익은 전부 빼앗았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즉위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융과다와 연갱요는 옹정제의 총애와 큰 업적을 바탕으로 교만해지며 뇌물을 받고 자신의 파당을 만드는등 옹정제를 위협하는데 이르자, 결국 제거되어 연갱요는 자결해야했으며 융과다는 황가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집에 유폐되어 죽을때까지 나오지 못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인 건륭제만큼 화려하고 눈에 띄는 업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강희제 말년에 팽배하던 부정부패를 바로잡고 기강을 잡았습니다. 강희제 말년에는 청나라 국고에 800만냥의 은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텅 비어있는 상황이었지만, 옹정제가 통치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강력한 통치로 인해 5년만에 5천만냥으로 늘렸을만큼 그의 통치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로인해 옹정제의 통치시기에는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고 조세제도도 개편되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어갈수 있었지만, 그의 아들 건륭제는 이런 아버지의 노력이 무색하게 자신이 직접 신하들에게 선물을 받고 총신들이 뇌물을 받아 재산을 늘리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해버렸으니 청나라는 옹정제가 죽는순간부터 쇠퇴했다고봐도 무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