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의 실책들
원나라 말엽에는 곳곳에서 가뭄과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굶주리며 고통받다가 죽어갔습니다.
1328년 안휘성에서 태어난 주원장 역시 농민집안으로 굉장히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마침 그가 17살이 되던 해에는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굶주리다가 병까지 돌아 그 일대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주원장의 부모와 형들이 죽고 간신히 혼자 살아남은 그는 절에 들어가 출가했지만 결국 이리저리 유랑하며 구걸하는 탁발승이 되었고, 이때의 기억이 좋지 않아서인지 황제가 된 이후 승려나 도적과 같은 표현과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래도 운좋게 1352년 곽자흥의 수하로 들어가 그의 눈에 들어 양녀와 결혼하여 지위를 굳혔고, 곽자흥이 위험할때 그를 돕는등 인심을 얻었으며 원나라의 승상 토크토아의 공격을 방어하여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곽자흥이 죽은후에는 그의 세력을 흡수하고 강남지역의 중심지인 남경을 점령해 오국공이 되는등 남쪽의 홍건군 중에서도 굉장히 큰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원나라와 대립할것 같았던 주원장이지만, 이후에는 원나라군과 싸우기보다는 같은 홍건군과 싸워 내부투쟁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송나라를 재건했다는 홍건군의 중심인 유복통은 한림아를 황제로 세우고 북벌을 시도하는등 원나라와 투쟁을 계속했는데, 마침 혜성처럼 등장한 원나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고 연패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한림아를 돕지 않고 오히려 남방의 가장 큰 홍건군인 진우량과 싸워 진양호 대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등 철저히 홍건군 내부와 싸우며 원나라의 공격을 피하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호광 일대의 진우량을 위해 주원장과 싸웠던 전사들을 살려주는 대신 배에서만 살게하고 철저히 땅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벌을 내렸기 때문에 이때 원치않게 벌을 받은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수 없어 남자들은 노예가 되거나 여자들은 기생이 되는등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져 생활했으며, 명나라 내내 이런 정책이 지켜지다가 나중에 청나라 만주팔기가 입성하며 악습들을 폐지했기 때문에 그제서야 이들이 평민으로 살아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대항한 사람들이지만 통크게 이들을 용서하고 이후 벌어질 몽골과의 싸움에 동원했다면 더욱 큰 성과를 낼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 벗어날수 없는 멍에를 짊어지게 만들었으니 이점 역시 주원장의 큰 실책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진우량을 이기고 남방의 패권을 쥔 주원장이지만, 차칸테무르에게 수도인 개봉을 잃고 쫓겨온 한림아의 존재는 굉장히 부담으로 남았습니다. 홍건군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지게 되어 차칸테무르의 표적이 된 주원장이지만 마침 원나라 조정의 견제와 분열로 인해 남쪽으로 정벌이 어려웠고, 마침 차칸테무르가 암살되며 한숨돌리는 상황이 되자 한림아는 때맞춰 굉장히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황제를 칭하려던 주원장이 껄끄럽던 한림아를 암살했을거라는 추측이 우세합니다. 나름 몽골과의 투쟁을 통해 홍건군 전체의 수장으로 떠받들여진 한림아는 언제든지 때를 노리고 있던 주원장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이후 남방의 장사성마저 제거한 주원장은 1368년 남경을 근거로 명나라를 건국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북벌군을 파견해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와 응창부를 점령해 수많은 보물과 포로를 잡아 몽골을 몰아내고 통일제국을 이룩했습니다.
이렇게 눈부신 업적을 세운 주원장이지만 본격적인 그의 실책은 이때부터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1380년 승상이었던 호유용의 반역이 일어나자 개국공신이었던 이선장을 엮어 처형했으며, 남옥 등의 유능한 장군들도 황제권 강화를 위해 목이 달아났습니다.
그런후 승상제도를 폐지하고 확고한 황제 독재체제를 수립했는데, 이것이 결국 명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낳은것입니다.
주원장과 같은 능력있고 부지런한 황제가 국가를 통치할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유독 명나라에는 혼군과 암군들이 많았고, 이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자 환관들이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대신 국가를 통치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쳐버렸으니 이런 불행의 씨앗은 초대황제인 주원장이 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또한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자손들에게 부담을 덜어준것은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지만, 결국 너무 많은 숙청으로 인해 이후 발생한 연왕의 반란을 막아내기 힘든 상황도 주원장의 손에서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연왕 주체는 북방에서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몽골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만약 명나라의 안정을 바랬다면 주체도 숙청해 더욱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체를 그냥 내버려두는 바람에 결국 연왕은 훗날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조카의 자리를 빼앗아 영락제로 등극하는 비극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빈농일때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을 보며 이런 모습을 혐오하는 태도를 갖게된 주원장이라 그런지,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처벌했으며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관리들의 녹봉을 너무 적게 책정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관리들의 녹봉이 너무 적어 일반 농민의 생활비와 비교해도 크게 높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관리들은 어쩔수 없이 백성들을 다시 쥐어짤수 밖에 없었고 이런 폐단은 명나라를 넘어 후대의 청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명 주원장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제일 높은곳까지 자신의 힘으로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긴 합니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책들로 인해 신생국가인 명나라는 태생부터 많은 문제점을 가지게 된것도 사실입니다.
황제 한사람에게 너무 집중된 권력과 더불어 관리들의 생활도 어렵게 만드는 적은 녹봉, 그리고 수많은 공신들을 처형해 자신과 후손들의 자리를 공고히 한것은 좋지만 이후 벌어진 반란군을 막아낼 유능한 장수가 없었다는 정도를 보면 주원장이 저지른 실수는 굉장히 컸다고 봅니다.
결국 이런 실수와 실책이 겹쳐 명나라는 300년도 되지않아 농민반란으로 멸망했으며, 결국 만주족에게 모든 영토를 내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으니 창업군주 주원장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