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의 뿌리와 축소된 강역
935년 신라의 경순왕은 결국 고려태조 왕건에 나라를 들어 항복합니다.
쇠퇴해버린 신라의 국력으로는 고려를 막아낼수 없고, 쳐들어오는 백제군을 막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생각하겠다면서 천년이 넘게 지속된 신라왕조를 통째로 고려에 넘기고 고려귀족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모든 신라인들이 고려에 항복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마의태자는 남아있던 신라의 화랑들과 함께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신라를 재건할 방법을 찾았다는 후일담이 남아있는것을 보면, 신라의 유민들이 모두 신라땅에 남은것이 아니라 곳곳으로 흩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사라졌던 신라인들은 이후 금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다시 역사에 나타납니다.
금사 본기에 기록되길 금나라의 시조는 휘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 諱函普 初從高麗來) 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신라가 망하면서 고려로 대체되었고, 그로인해 고려인으로 기록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마도 각지로 흩어진 신라인들이 만주일대로 올라가 하얼빈 일대에서 웅거하던 여진족과 결합했고, 그 중에서 김함보라는 인물이 추장이 되어 여진을 통합하고 결국 그 완안씨가 중심이 되어 여진을 통합한 금나라가 건국된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입니다.
또한 이후 부활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한번 정리하며 흠정만주원류고라는 책을 통해 여진족의 기원과 역사를 기록했는데, 이곳에서도 금나라와 신라의 연관성이 나옵니다.
금나라의 시조는 본래 신라에서 왔는데 완안씨라 호칭했다.(金始祖本從新羅來 號完顔氏)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다. 그러니 금나라의 먼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다.(新羅王金姓 則金之遠派 出於新羅)
이렇게 나중에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꾼 여진족은 금나라와 신라의 연관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금나라의 국호조차 신라왕성인 김씨를 따서 지은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지만 지금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계는 이것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완벽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신라가 멸망하면서 북으로 올라간 신라의 유민들과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여진족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금나라라는 것이니, 지금도 우리만 인정하지 않을뿐 금나라와 우리는 한 뿌리를 가진 동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거란이 가진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는 분명 대제국을 건설하고 송나라와 고려를 압박해 영토를 빼앗는등 적극적인 정책으로 큰 강역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은 금나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로 표시되는 것입니다.
물론 금나라는 남쪽의 북송을 멸망시킨후 나라의 절반을 빼앗아 국토를 크게 넓히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최소한 요나라보다 더욱 크게 강역을 그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쪽에서 내놓는 강역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금나라가 생각보다 큰 영토를 가졌기 때문에 이후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20여년을 충분히 버틸수 있었고, 삼봉산 전투에서 주력군이 궤멸하기 전까지 금나라군은 무시할수 없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더욱 확대된 강역을 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