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웅정필
임진왜란 이후, 국가가 초토화된 조선은 물론 군사를 보내면서 막대한 물자까지 지원한 명나라 사이에 있던 여진족은 누르하치의 영도아래 급속히 강해졌습니다.
물론 누르하치는 임진왜란때 조선을 돕기위한 군사를 보내겠다는 의사를 조선 조정에 피력하기도 했지만,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군사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진에게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것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를 돕다가 사건에 휘말려 명나라군의 손에 모두 죽었는데, 이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명나라에서 보낸 물자를 기초로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웠고, 여진족들을 통합하면서 결국 금나라 멸망이후 다시 여진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원래 여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명나라와 조선은 그들이 뭉치지 못하게 분열과 회유로 끊임없이 여진족을 약화시켜왔는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결국 여진의 통합이 성사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응징하기 위한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이 결성되어 여진 정벌에 나섰지만,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조선군이 대패하면서 오히려 여진의 기세만 올려주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시 요동지역은 완전히 여진에 노출되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는데, 당시 웅정필이 자원해서 요동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웅정필은 요동으로 출발하기 전에 만력제를 만나 전장에서의 전권을 보장받았으며 후방에서 참언을 듣고 자신을 흔들지 말 것을 요청하면서 임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르후 전투에서 요동지역의 명나라 정예군은 전멸했고, 물자와 군사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웅정필은 우선 여진의 도발에 맞서 싸우지 않고 각지의 거점을 지킨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각지의 명군을 충원하고 거점을 지키며 여진의 공세를 막아낸 웅정필은 18만의 병력을 확보하고 곳곳에 성을 쌓아 대비했습니다. 그러자 누르하치 역시 쉽게 공격하지 못했고, 1년 정도는 도발하지 못한채 사태를 지켜만봐야 했다고 합니다.
다만 웅정필은 뛰어난 장수가 아니었던 탓에, 여진을 크게 물리치는 전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웅정필을 믿고 보내준 만력제가 죽고 그의 아들 천계제가 즉위했는데, 그는 글도 제대로 모르면서 매일 목수일에 매달리면서 정치를 내팽개치고 노는데 열을 올렸던 암군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웅정필의 전공이 없다는 식으로 탄핵이 들어오자, 결국 절망한 웅정필은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욕적으로 명나라를 위해 일했던 인물이 참소로 인해 물러나고 말았으니, 명나라 말기의 상황은 역시 개판이었던듯 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유능한 관리라는 평가를 받았던 원응태가 부임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공격을 재개합니다.
결국 수많은 군사들이 전사했으며 70여개의 성들이 함락되었고, 요동지역에서 가장 큰 요양과 심양까지 함락되면서 누르하치는 심양을 근거로 후금을 건국하면서 명나라의 세력은 요동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웅정필을 다시 보냈지만, 왕화정이라는 졸렬한 인물을 함께 보냄으로써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주로 수비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웅정필이지만, 그에 반해 큰 공을 세워 아첨할 기회만 노리던 왕화정은 애초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인데 당시 권력자인 위충현과 친하다는 이유로 이렇게 큰 자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특히 후금으로 넘어간 명나라 무장들과 결탁하고, 조선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과 몽골의 40만 대군을 끌어들여 일거에 누르하치를 섬멸한다는 전략을 세운 왕화정이었지만 정작 빠르게 공격해 들어온 누르하치를 막지못하고 대패하게 됩니다.
왕화정이 믿고있던 후방의 어떤 세력도 그들을 구원하러 오지 않았고, 그저 요동과 요서의 모든 땅을 잃어버리고 산해관으로 후퇴해 지키는 대패를 기록하자 결국 왕화정은 웅정필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웅정필과 왕화정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직책상으로는 웅정필이 높았지만 위충현의 위세를 업고 대다수의 병력을 통솔한 왕화정에게 패배의 책임이 더 크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위충현이 요구한 돈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웅정필이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으며, 왕화정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1625년 처형된 웅정필의 목은 변방에 본보기로 보내져 치욕을 당했지만, 결국 천계제의 뒤를 이은 숭정제가 즉위하면서 1629년 다시 복권되어 억울한 죽음을 위로받고 양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요동지역의 희망으로 떠오른 웅정필은 흩어진 명군을 다시 모으고 성곽을 수리하며 힘들게 요동지역을 재건해냈지만, 명나라 조정의 불안한 상황과 권력자인 위충현의 농간에 의해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만약 웅정필이 물러나지 않고 계속 요동경략으로 재직했으면 누르하치가 아무리 날고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쉽게 명나라를 공격하지 못했을텐데, 결국 명나라 스스로 인재를 죽이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으니 자업자득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