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백범 김구선생 서거일(1949.6.26)

hasutalchul 2024. 6. 26.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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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6월 26일이 아니라, 우리민족에게 있어 비극적인 날입니다.

일제의 탄압과 추격을 피해 대륙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항쟁을 계속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백범 김구선생이 암살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1876년 황해도에서 출생한 백범 김구는 명문가의 후손입니다. 고려 말의 이름난 명장인 김방경의 25대손인 안동김씨였지만, 조상인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몰락하여 당시에는 평민의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에 투신하면서 사회개혁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맞서 항거하던 선생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에 맞설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의병운동에 투신해 일본과 직접 맞서 싸우다가 결국 경술국치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비롯한 직책을 수행하다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된후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고, 이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원하는등 대외적인 활동에도 힘써 중화민국의 장개석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6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백범을 잡는데 혈안이었습니다. 당시 60만원은 쌀 한가마니가 2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현재의 약 200억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니, 백범 김구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던지를 알수 있습니다.

다만 백범이 계획했던 국내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직전에 일제가 원자폭탄 두발을 맞고 항복하는 바람에 계획을 실행조차 못하고 접어야했으며, 조선땅은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며 분단되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범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했으며, 지금의 종로에 위치하고 있던 경교장에 은거하며 통일된 조국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백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쪽에는 김일성의 북한정권이 수립되었고, 남쪽에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그렇게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백범은 우파의 어른으로서 이런 상황에 반대했지만, 남쪽에서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이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그를 견제했기 때문에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중 1949년 6월 26일 백범선생을 찾아온 한 육군소위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선생은 서거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을 평생 집요하게 노린 일제도 해치지 못한 그였지만, 결국 같은 민족이었던 자의 총탄에 숨을 거둔 것입니다.

백범선생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경찰에 검거된 살해범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혔지만 곧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안두희는 석방되어 다시 군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은 안두희는 평생동안 호의호식하며 살았고,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한 의사의 손에 의해 결국 처단되었습니다.

 

 

당시 버스기사로 일하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던 박기서님은 1996년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를 급습해 평생동안 단죄받지 않았던 안두희를 제거했으며 백범선생을 살해한 원한을 갚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살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하지만, 안두희가 평생동안 호의호식하며 처벌받지 않은 것을 모두가 보았기 때문인지 박기서님은 수감된지 1년 3개월만에 사면을 받아 출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백범선생 사망에 대한 정확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가 선생을 살해했다고 알려져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채 올해도 선생이 서거한 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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