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수많은 왕조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장안의 역사

hasutalchul 2022. 11. 1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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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시 · Shaanxi, 중국

Shaanxi,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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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은 역사에 일찍부터 등장하는 도시입니다. 특히 이곳은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장안을 포함한 관중지역을 얻으면 천하를 호령할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하는 장안지역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1027년경 등장한 주나라부터 시작됩니다.

은나라, 혹은 상나라라고 불리던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의 패권을 쥔 주나라의 도읍지가 바로 장안 인근의 호경이었습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각지에 제후를 봉하며 천자를 자처한 주나라의 왕실은 지금의 서안 인근에 호경을 건설하여 제후들을 통솔했지만 기원전 770년경 견융이라는 외적의 침입을 받아 왕이 살해당하고 도읍인 호경마저 몽땅 털리는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이후 견융의 지속적인 침입을 막지 못해 시달리던 주나라는 동쪽에 있던 낙읍으로 천도하게 되며, 이후 주나라는 완전히 권위를 잃어버리고 각지의 제후들이 날뛰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진나라가 장안일대에 도읍지를 건설합니다.

진나라의 함양성은 주변의 기름진 농토와 함께 황하와 위수, 산맥들이 가로막는 요새였으며 이곳의 생산량을 바탕으로 결국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시황제의 손에 의해 천하를 통일하는 업적을 이룩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곳곳에서 이어진 반란으로 진나라의 통일은 금방 끝나게 되며, 시황제가 각지에서 사람들을 징발하여 거대하게 만들었던 함양성과 아방궁은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의 손에의해 폐허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항우와의 치열했던 전쟁을 승리로 끝낸 한나라의 유방은 원래 도읍을 주나라가 있던 낙양지역에 두려고 했습니다.

낙양 부근의 성고성과 형양성에서 항우의 초군과 그렇게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며 결국 지켜낸 낙양 일대는 방어에도 용이하며 근처에 황하 인근의 높은 생산력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수도를 건설하려 했지만, 결국 조언을 받아들여 금성탕지의 지역인 관중일대로 수도를 정하게 됩니다.

진나라의 함양성이 폐허가 되었지만, 어느정도 남아있는 궁궐과 건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인 장안을 건설했으며 이 일대를 따라 호경이나 함양과는 다른 새로운 도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한나라 시대의 장안은 비로소 오랫동안 이어진 혼란을 수습하며 새로 개척된 비단길의 종착역으로서 큰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무제시절 개척된 비단길을 통해 수많은 서역상인들이 드나들었고 시장에서도 온갖 호화로운 제품들이 거래되었다고 하니, 당시 장안의 번영을 잠깐 엿볼수 있는 사례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나라를 찬탈한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면서 장안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왕망이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막지못해 전복과 술만 먹으며 허송세월하고 있을무렵, 서쪽에서 들어온 적미군이 장안으로 밀고 들어와 왕망을 죽이고 장안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장안성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립니다.

그후 한나라를 재건한 유수는 수도이던 장안을 재건하는것 보다는 자신의 근거지인 남양과 가까운 낙양으로 천도해버렸고, 결국 장안일대는 복구되지 못한채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장안일대는 후한말기에 황제를 끼고 권세를 누리던 동탁의 손에 의해 어느정도 복구됩니다. 낙양을 불지르고 장안으로 천도한 동탁의 손에 의해 버려졌던 장안이 어느정도 제 모습을 찾기는 했지만 동탁이 살해되고 그 부하들끼리 싸우게 되면서 다시 재건한 장안성은 다시 황폐화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통일한 서진왕조는 자신들끼리의 내전과 권력다툼으로 인해 쇠약해졌고, 결국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지속적인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결국 311년 유총과 석륵의 손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고 당시 황제였던 회제를 사로잡자, 황족이었던 사마업이 장안으로 피신하여 서진왕조를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꾸준히 이어진 전쟁으로 이미 황폐화된 관중일대는 왕조가 버틸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유요가 이끄는 조나라군이 지속적으로 침입하여 괴롭히자, 결국 항복하여 진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은 북방으로 끌려갔으며 장안을 비롯한 관중일대는 다시 황폐화됩니다.

 

그렇게 기억에서 잊혀지던 장안은 다시한번 화려하게 부상합니다.

북방일대를 통일한 부견의 전진이 장안을 수도로 삼으며 큰 번영을 누렸고,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과 사람들이 평화롭게 거래하고 생활하는 그런 곳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전진이 남쪽에서 전쟁에 패하고 북방이 다시 어지러워지며 혼란에 빠졌고, 한동안 장안은 다시 잊혀지게 됩니다.

 

이후 북방을 통일한 북위가 동과 서로 갈라졌는데, 서위의 수도가 바로 장안이었습니다.

서위와 동위가 대치하다가 각자 북주와 북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북주의 위대한 군주였던 무제의 손에 의해 다시한번 북방이 통일되었고 이 북주를 찬탈한 수나라에 의해 천하가 다시 통일되게 됩니다.

손자에게 북주왕조를 찬탈한 수나라 문제는 기존의 수도였던 장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한나라 시절부터 사용하던 장안성이 너무 좁고 답답하다는 이유를 들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합니다.

기존의 장안성에서 좀더 떨어진 곳에 커다란 수도를 새로 만들었으며, 이곳을 대흥성이라고 이름붙였지만 어차피 장안성과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그냥 장안성이라 불리게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속출하는 가운데 빈집을 노려 찬탈한 당나라는 수도를 수나라의 대흥성으로 정하고, 정식으로 장안성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비록 시작은 썩 좋지 않았던 당나라지만, 결국 주변의 이민족들을 제압하고 끝까지 반항하던 고구려마저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당나라 현종 당시의 장안은 그동안의 번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호화로운 재물들이 넘쳐났고, 각지에서 몰려든 이슬람 상인들과 신라와 발해 사신들까지 모여들어 당제국의 수도로서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특히 서역일대를 정벌한 고구려 유민출신 고선지의 선전에 힘입어 서역의 상인들이 장안으로 모여들었고, 고선지가 사로잡은 서역의 포로들과 물건들이 넘쳐날 정도였다고 하니 어느정도로 장안이 번영했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번영의 끝은 몰락으로 이어지는 모양입니다.

이미 이전 북위시절부터 장안을 비롯한 관중일대의 땅이 건조해지고 염화가 진행되면서, 관중지역의 쇠퇴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나마 물을 적게 쓰는 작물인 밀을 재배하면서 어느정도 버틸수 있었다고 하는데, 혼란이 시작되는 당나라 중기부터 관중지역은 사람들이 흩어지고 외적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거의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이 되어갔다고 합니다.

마침 개발이 완료된 강남지방에서 거두는 조세를 대운하로 수송하면서 당나라를 유지할수 있었지만, 엄청난 곡물과 재화를 서쪽인 장안까지 운송하는데 막대한 돈이 추가로 들어갔으며 결국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온은 수도를 장안에서 변량으로 옮기게 됩니다.

새로 수도가 된 변량은 수로가 얽혀있어 곡물과 재화를 운반하기 쉬운 경제도시였고, 강남에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집권하는 국가들은 변경을 계속해서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송나라 이후로 완전히 쇠퇴한 장안은 그렇게 복구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나라 말기에 주온이 당의 환관들과 대신들을 죽이고 낙양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궁궐이 불타고 주변은 황폐화되었는데, 이후 역사에 장안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한참 후의 명나라때입니다.

 

원나라 말의 혼란을 수습한 명나라의 주원장은 서쪽에서 이어지는 몽골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골치아팠다고 하는데, 그것을 막기위해 그동안 성벽조차 없이 방치된 장안을 재건하면서 서안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렇게 서안으로 이름을 바꾼 장안은 두번다시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섬서성에서 낙후된 도시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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