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여준 불세출의 명장 벨리사리우스

hasutalchul 2022. 10. 2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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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서로마제국은 475년 게르만족 수장인 오도아케르의 손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렇게 서유럽은 완전히 분열되고 쪼개져 한동안 강력한 정치체제가 나타나지 않는 혼란의 시기가 되었지만 동방의 동로마제국은 부유한 동서무역의 중계지를 발판삼아 계속해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물론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침입을 계속해서 받기는 했지만 강한 세력에게는 돈을 쥐어주고, 약한 세력들은 제국의 군대를 이용해 토벌하는 정책으로 이후 천년가까이 동로마제국을 더욱 이어나가는 원동력을 마련하게 되는것입니다.

 

서기 527년 로마제국의 단독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훗날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은 인물로 평가되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는 칭호를 받을만큼 마지막 로마의 불꽃을 불태운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광은 그의 밑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군분투한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막대한 공헌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동쪽의 페르시아는 물론 북쪽의 슬라브족과 서쪽의 고트족과 싸우면서 한번도 크게 패한적이 없었고, 항상 그의 재능을 시기한 황제의 견제로 넉넉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이뤄낸 전공들이기 때문에 더욱 벨리사리우스의 능력이 돋보이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벨리사리우스는 고트족계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출생연도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저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해 일개 병사에서 오로지 자신의 뛰어난 감각으로 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으며, 이후 유스티니아누스의 가장 큰 업적으로 볼수있는 이탈리아 원정군까지 이끄는 장군으로 출세하게 됩니다.

 

우선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볼수 있는 사례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과 싸운 전투입니다.

원래 북아프리카는 카르타고 시절부터 시작되어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으며, 황량한 지금과는 다르게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진 로마의 중요한 식량기지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북방에 있던 반달족이 곳곳을 파괴하며 유럽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반달족 덕분에 이런 행위를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유래가 된 것입니다.

우선 이 풍요로운 북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해 황제는 벨리사리우스에게 겨우 15000명의 병력을 주었고, 이들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 도착하여 10만이 넘는 반달왕국의 군대와 교전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다시 로마의 품으로 돌아온 북아프리카는 이때부터 로마제국의 중요한 배후기지의 역할을 맡았으며, 훗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을때도 이곳출신인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다시 전황을 수습하고 페르시아를 격파하는 발판이 되어준 곳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는 로마의 본토였던 이탈리아 원정길에 오르게 됩니다.

겨우 7000명의 병사만 보내준 황제의 부실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 버티고 있던 15만이 넘는 고트족 군대와 치열한 교전을 펼쳤으며 모든 보급을 스스로 해결하는 와중에 옛 수도인 로마를 탈환합니다. 거기에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역을 손에 넣고 승승장구하지만, 그의 전공을 시기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도중에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은 환관 나르세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지휘하여 벨리사리우스가 함락시키지 못한 지역까지 수복하며 원정을 마무리하지만, 가혹한 세금징수와 약탈로 인해 인심을 잃으며 빠르게 획득한 영토를 다시 잃고 맙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시기와 의심으로 한동안 고생하게 됩니다.

모든 작위를 반납하고 조용히 살던 그를 다시 부른것은 당시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고생하던 유스티니아누스였으며, 다시 불러준 황제를 위해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무사히 반란을 진압하여 다시한번 황제의 신임을 되찾았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후에는 동방의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다시한번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기는 했지만 더욱 부실한 지원과 함께 전선이 고착화되어 지지부진한 가운데 원정군의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로마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야인으로 물러나있다가 병을 얻어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는데, 죽는 순간까지 그를 두려워하며 견제한 황제의 의심을 피할수는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벨리사리우스의 능력은 로마제국을 통틀어 최고였다고 평가되며, 아마도 제대로 된 지원을 받으면서 곳곳을 원정했다면 로마제국의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을거라는 추측이 나올만큼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입니다.

그가 군대를 통솔하고 이끌어 전투를 승리하는 방식은 이후의 장군들이 모방할만큼 뛰어났고, 특히 타고난 감각으로 임기응변하는 능력은 서양사에서도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정도였다고 합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군대를 양성하고 전투에 승리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역사의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제한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최선의 성과를 낸 벨리사리우스는 이후 로마의 어떤 장군도 따라가지 못할만큼 큰 공적을 남겼으며, 이런 불세출의 위대한 장군을 시기하고 경계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대제의 칭호가 아까운 소인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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